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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Mar 29. 2017

[서평] 젊은 스탈린

젊은 스탈린, 사이먼시백 몬테피오리 지음, 김병화 옮김, 시공사


역사를 주의 깊게 복기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사는 꽤나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보기도 한다. 특히나 나의 할아버지의 아버지 세대쯤 되는 일백 년 전 서구의 시대상은 현재와 그 구도가 비슷한 경우가 많아, 잘 읽다 보면 그 행간의 숨은 의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가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히틀러의 집권과정이 상당히 민주적이었다는 이야길 해주면 종종 깜짝 놀라는 표정을 확인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파탄이 난 독일은 좌우 극한 대립의 상태의 사회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일에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당시의 선거 결과만 하더라도 독일의 사민당 및 공산당, 중앙당, 인민당 등 다양한 정당이 유효한 득표를 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나치당의 히틀러가 뭐 처음부터 악마의 화신으로 나타나 다 죽여버리겠어! 하며 장악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사회의 불만세력을 등에 업고, 이 사회의 쓸모없는 것들을 다 청소해 버리겠다는 극우적인 성향의 발로로 시작된 것이 이 나치당의 모태였다. 선거를 통해 이러한 전략은 조금씩 먹혀들기 시작했고, 1933년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가지고 공산당 박멸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실상 나치당-사민당-공산당의 어느 정도 균형(?)이 잡힌 당시 독일 의회는 한쪽 축의 붕괴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 갔고, 비상사태의 선언 및 히틀러의 수권법 통과로 인해 나라는 순식간에 나치 독일이 되어버렸다.


나도 미움을 사기 싫어 SNS를 통해 정치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늘 정치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 일백 년도 되지 않은 1933년의 독일을 보면, 언제 우리가 선거를 잘못하여 사회가 순식간에 망가지는 꼴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나치와 같이 극우가 된다면, 혹은 이 책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소련과 같이 극좌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릴 무서운 재앙이 될 것이다.


젊은 스탈린은 꽤나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발생한 수천만명의 사망자를 생각하면 그 매력 있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내어놓기 조심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극과 극의 인물, 히틀러나 스탈린도 갑자기 어디 악마의 세계에서 잉태된 인물이 아니란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도 몇 번 언급한 바는 있지만, 나는 이렇게 상세한 탐사를 통해 어떤 인물에 대한 전기를 쓰는 건 사회를 위해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첫째로는 그러한 역사적 거인(?)들의 민낯을 통해 우리와 같은 소시민들도 리더십이나 감정적 흐름을 반추해볼 수 있을 수 있고, 둘째로 객관적 역사의 증언을 통해(다양한 주관이 모여 객관을 이룬다는 의미) 현시대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절반 이상이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중심인물이 되기 전 이야기를 다룬다. 어린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던 고학생이자 신학생, 화려한 언변과 매력으로 다양한 여인들과 얽히고설킨 연애담, 은행강도 혁명가와 수많은 유배시절 이야기. 그중에서도 마지막 유배지인 북극과 거의 맞닿은 시베리아 투루한스크 유배생활은 스탈린이란 인물을 제외하고서도 충분히 드라마틱한 인생으로 서사에 흠뻑 빠지게 된다. 여기까지 책의 2/3 가량을 그냥 재미로 보았다면, 나머지 1/3은 소비에트 연방의 수립과정에 대해 그 급박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소련의 형성과정도 상당히 인상적인 것이, 니콜라이 2세를 끝으로 막을 내린 러시아의 막장 왕조는 그렇다 쳐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뉜 진영의 형성은 꽤나 신선한 구도였다. 그저 레닌이라는 지도자, 그리고 똑똑한 트로츠키와 무자비한 스탈린의 구도로 일으켜졌다고 생각한 소련의 경우에도, 초기 형성과정에서는 멘셰비키의 득세로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사실 나의 멘셰비키에 대한 이해는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닌데, 인터넷을 찾아 추청해 보건대, 볼셰비키보다는 급진적이지 않은, 조금은 사민주의와 가까운 쪽의 스탠스가 아닌가 싶다. 책에 따르면 레닌을 비롯한 트로츠키 및 스탈린은 멘셰비키와의 적당한 동반자 관계를 극도로 경계했는데, 만약 그러한 조합의 국가가 탄생했다면, 인류는 스탈린이라는 악마를 탄생시키지도 않았을 수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 스탈린이란 악마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그보다 더 우위에 있는 악마(?)인 히틀러를 제압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는 점은 인류 역사의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차르 왕조가 무너지며, 러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좋아하고 흥겨운 모습이 벌어지는 부분을 읽으며, 나는 다시금 그 혁명의 무서움과 불완전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신들의 운명이 다시 그 차르 시대 이상의 공포정치 속에 놓일 것을 알지 못하고, 공산주의라는 인센티브가 부재한 상황에서 결국 다시 빵 하나를 사기 위해 그 추운 모스크바 거리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하는 운명을 예감하지 못하고 좋아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레닌을 비롯한 스탈린 등 다양한 지도자들은, 그 혁명이란 단어에 있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숙청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평화적 상황에서 혁명을 운운하는 일부 지식인이란 사람들에 대한 개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프랑스혁명이나 볼셰비키 혁명과 같이, 사회를 뒤집지 않으면 연명하기 어려운 환경이라 할 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혁명. 그것이 과연 이 시대에 다시 요구된다 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희생을 발판으로 될 것인가. 결국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책을 덮으며,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게 된다. 내가 사는 이 사회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러한 과오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생각보다 매우 복잡다단한 이러한 문제는, 조금씩 더 많은 책을 접하며, 그리고 사회 속에서 경제활동 및 육아 등의 일상생활을 경험하며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인 듯하다. 지나친 관념의 연속도, 지나친 일상의 연속도, 어느 하나 온전히 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람이 스산한 어느 봄날. 도적과 같이 찾아온 이 대선의 흐름 앞에, 나는 또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지, 조심스럽게 다시 고민을 해보게 된다. (2017.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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