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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Mar 21. 2017

공터에서, 김훈, 해냄, 2017

공터에서, 김훈, 해냄, 2017


종종 주변을 보면 부모세대, 혹은 조부모 세대에 대한 불만이 존재하는 분들을 볼 수 있다. 이를 자세히 조금 더 들여다보면 세대뿐만 아니라 직계로 올라간 아버지 어머니,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불만, 혹은 분노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데 만약 이 책이 등장하는 일부 인물들과 같이, 한 사람이 잘못된 인격체로 성장한다고 하면, 그것은 오롯이 그의 잘못인가 아니면 그 사회의 잘못인가. 이를 어느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긴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사회가 개인의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데에 미치는 영향은 필연적일 수 있다.



이 책에는 크게 삼대에 걸쳐 등장인물이 존재한다. 그 삼대 중의 마지막 인물은 나와 태어난 시기가 비슷한 80년대 초반의 어린 아이다. 그의 할아버지 마동수는 1910년 경술년 개띠이고, 그의 아버지 마차세는 아마도 나의 부친과 비슷한 50년대 후반생으로 추정된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어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솔직히 김훈 작가의 소설은 한 장 한 장, 한 문장 한 문장 삼키기가 매우 어렵다. 등장인물 어느 하나 인생의 짐을 지지 않은 자가 없고, 작가가 그야말로 혼과 열을 다해 그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글을 써 내려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김훈 작가의 소설을 애정 하는 까닭은, 실상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어느 하나 남루하지 않거나 슬픔과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엔 엄친아 엄친딸이란 이름으로, 현재엔 페북 인스타 네임드라는 이름으로, 겉으론 화려하고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제대로 들여다보면 그 깊은 인생의 무게를 더 현저히 느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전 세계 어딜 둘러봐도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듯이,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도 언제나 행복하거나 잘나기만 한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그런 인생이 있다고 믿는다면, 내 짧은 인생 경험과 아집 섞인 견해로 조언해 보건대, 그런 인생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 행복 전도사라 아침마다 TV에 나와 듣기 좋은 소리 하던 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의 후계자라는 분, 최고의 야구선수와 최고의 여배우의 사랑, 이러한 분들의 슬픈 결말은 우리가 천천히 곁에서 지켜봐서 잘 알고 있다.



SNS 공간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가 보는 이 공간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하지 않는 내면의 말을 토해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다지 살아가며 생각보다 진지하게 내면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정말 친한 친구 거나, 술김에 취해, 혹은 종교단체 등에서 고백 같은 형태로 간간히 말을 하긴 하지만, 직장이나 일상을 살아가면서는 가급적 좋은 면만 보이려 하지 굳이 힘들고 어려운 면을 보여 책을 잡히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가끔 자신의 힘들었던 인생 경험을 덤덤히 써 내려간 글에는 따봉을 백개 천 개라도 드리고 싶을 만큼 고마움을 느낀다. 언론에 등장하는 저명한 인사들의 인터뷰 혹은 자전적 에세이에선 느낄 수 없는 삶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은 월터 아이작슨이라는 전기작가가 철저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주변 사람들 인터뷰를 통해 서술했다. 그러다 보니 이 인류의 생활패턴을 바꿔 놓은 천재의 비인간적인 면모, 과대망상에 빠진 모습, 왜곡된 과거의 기억, 등이 전부 서술되어 있다. 심지어 사생아로 태어나 입양되었던 자신이, 자신 친딸의 존재를 몇 번이고 부정했던 사실까지 기술된다. 나는 여태 읽어온 그 수백 권의 위인전보다 이 자서전의 가치는 수백 배 크다고 생각한다. 그 어느 위인이, 평생 올곧고 바른생활만 하며 인생을 살아올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천재도 일정 부분에 있어선 남루한 나보다 더 비굴했던 인생의 편린이 있었다는 것은, 나도 그럭저럭 살만한 존재하는 인식을 하게 만들어 준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면 (물론 내러티브를 가진 소설이라 그 스토리를 중심으로 서평을 꾸려갈 생각은 전혀 없다), 작가의 신작 '공터에서'는 앞서 언급한 인생의 보편성을 느끼게 하는 데 있어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나라가 없는 설움을 가지고 살아갔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국전쟁, 남북으로 갈린 이념의 선택, 독재와 급속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사회의 변혁. 권위주의 시대, 그리고 폭력의 시대. 비상식이 상식이었던 사회, 어제의 도덕이 내일의 비도덕이 되는 사회, 이런 사회에 있어서 그 먹고살기 위해서 견뎌내어야 했던 가치관의 상실. 이런 것은 더없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 더듬어 보자면 60-70년대를 살아가며 동네에 미친 사람, 바보 한 명 없던 동네가 없었고, 시골엔 저수지에 몸을 맡기거나 농약을 먹고 세상과 작별했던 사람들이 참 많았다고 전해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항상 이야기하지만, 가끔 이 시대에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다행임을 느낀다. IMF 시절 전에 경제활동을 했으면, 분명 지금도 연대보증 몇 개쯤은 섰을 것이고, 돈 빌려달라는 사람도 매번 전화 왔을 것이다. 컴플라이언스 따윈 개나 줘 버렸을 시스템에서 살아갔을 것이고, 위에서 그저 까라면 까야하는 업무를 했을 것이다. 자녀의 원활한 학교생활을 위해 매년 촌지를 가져다 바쳤을 것이고, 명절이면 거래처에 한우세트를 돌리기 바쁘고, 나는 또 협력업체들로부터 받은 백화점 상품권 몇십 장을 손에 쥐고 흐뭇해했을 수도 있겠다. 십여 년의 짧은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이러한 악습이 눈에 띄게 사라져 감을 체감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란법 시대에 살아가는 일원으로 모종의 뿌듯함마저 느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면, 어린 시절, 사회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하다 보면, 부모 혹은 조부모 세대에 대한 원망이 쌓이기 시작할 수 있다. 왜 저러한 인생을 살아갔을까. 나라면 저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 책과 같이 삼대만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그 시대의 환경은 내가 살아가는 시대와 매우 다를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고 본다. 단적으로 반백년 전만 하더라도 지주-소작농 상하관계가 존재했고, 친어머니와 새어머니가 한 집에서 사는 경우도 많았고, 그 시절 고관대작들은 공금을 가지고 무엇을 해도 되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작금의 사회도 그리 정상적인 사회는 아니지만, 적어도 대통령이나 재벌 총수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느 누구나 같은 인격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가치관의 탄생;Foragers, farmers, and fossil fuels'에서 이언 모리스는 시대별 다른 가치관의 기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첫째, 절대 보편의 완벽한 인간 가치 체계를 주장하는 도덕철학 이론은 모두 시간 낭비라는 뜻이고, 둘째, 우리가 오늘날 금과옥조로 받드는 가치관도 머지않은 미래에 골동품이나 폐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p.26"

즉, 우리의 바로 윗 세대, 그리고 그 전 세대로 가자면 적용되던 가치관 자체가 달랐던 시대라는 말이다. 급변하는 사회, 길어지는 평균수명에 따라 세대 간의 갈등은 점점 가속화될지 모르겠다. 인류는 사실 긴 수명을 다 누리며 3-4대가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본 역사가 없다. 물론 그분들 중 정말 노답인 경우도 있지만, 조금씩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야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삶의 무게와 어려움도, 조금씩 걷어내거나 가볍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로 마무리를 해본다.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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