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연히 거인의 어깨라는 프로그램 3회를 봤는데, 이는 서장훈 씨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며 토론하는 식의 프로였다. 이번 주 주제는 '당신의 수저는 무슨 색입니까'라는 다소 진부한 주제였고, 발제를 맡은 어느 사회학자는 우리나라의 갑질 문화를 탓하고, 베스트셀러 작가라 하는 사람은 서양의 귀족이 딱히 그렇게 머리 좋고 고상한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피력했다.
뭐 둘 다 하나마나한 탁상공론임과 동시에 진부한 인식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어느 뇌과학자가 등장하여 그 계급이나 수저와 같은 용어 사용 자체가 한 사람의 한계를 재단하게 되므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뇌과학은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이기도 하거니와, 몇 가지 제시되는 연구논문이나 실험이 나에게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예컨대 빈 공간에 흩뿌려진 점들의 파편이 처음엔 무의미한 낙서에 불과해 보였지만, 한번 옆에서 이 그림은 어떤 사물을 그린 것이라고 알려주기 시작하면 우리 뇌는 다시 이전의 인식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그러니까 어떠한 용어의 사용이 보편화되면, 그 이전의 인식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말이다. 듣고 보니 무릎이 탁! 쳐지는 말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두 연사와는 다소 상반된 주장인지라 조금의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내가 앞서 언급한 두 연사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자꾸 그 수저론이나 갑을문화를 '우리나라'에 한정시키기 때문이다. 어떠한 문제가 정말 우리가 거주하는 한국이라는 곳에만 존재한다면 정말 그것은 타파해야 하는 문제일 수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존재하는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라 한다면 이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금 민감한 이슈이긴 하지만, 수저론. 사실 수저론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은 없을 것이다. 그 격차의 크기는 물론 상이하겠지만, 적어도 출생에 의해 신분이 정해지던 패턴은 20세기 초까지 전 지구적으로 이루어지던 관습이었다.
스탠퍼드의 역사학자 이언 모리스의 '가치관의 탄생'이란 책을 보면, 인류를 수렵채집/농경/화석연료 시대로 구분하게 된다. 여기서 수렵채집은 위계보다 평등을 중시하고 폭력에 상당히 너그럽다. 봉건사회가 주를 이루던 농경사회는 평등보다 위계를 중시하고 폭력에 다소 덜 관대해지기 시작하며, 화석연료 단계에 와서 비로소 인류는 위계보다 평등을 강조하고 폭력을 용납하지 않게 된다.
서양의 귀족계급이 딱히 지적이지도 않고 워너비가 아니라는 어느 연사의 강연이 탁상공론이라는 이유는, 그것은 그 봉건 농경사회의 시대상이지 그 계급의 야만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그 중세 귀족계급이 서로 창을 겨누며 야만적으로 살아갔다고 치자. 그러면 당시 귀족이 아닌 평민 혹은 천민의 생활은 어떠했겠는가. 인권도 없고 깨끗한 물도 마시지 못하고 흉년이면 주린 배를 채우려 나무껍질을 긁어먹지 않았을까. 아마도 18세기 아일랜드에 거주했던 평민이라면 대기근으로 아사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비교대상을 화석연료 시대의 우리와 농경사회의 귀족으로 잡는 것은 지나치게 나이브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수저론이나 갑질의 특수성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선진국에서 유학을 해서 그런지 인류의 10-20%에 불과한 사회를 가지고 자꾸 한국과 비교하는 것에 익숙하다. 뭐 그래야 한국사회도 나아지기야 하겠지만, 나머지 80-90%의 사회와 비교해 봤을 때 결코 한국은 그 태생으로 인해 지나치게 불공평한 사회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비교적 먹고살만하다는 인도나 남아공만 보더라도 말이다.
부모의 경제력이나 성별에 따라 어느 정도의 출발선상의 차이는 존재하며, 이는 사회가 선진화되며 점차 줄여나가야겠지만, 이러한 차이 자체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시도가 과거에 있었으니 그것은 마오쩌둥 중국의 대약진 운동이다. 사유재산의 존재 자체를 불허하고, 마을에 공동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으며,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한다. 이 시도의 결론은 흉년으로 인한 수천만명의 아사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센티브가 주어지지 않는 환경에서 생산성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그에 따른 전체적인 하향평준화는 피할 수 없게 된다.
한국 헌법에 계급을 불허한다는 조항도 있지만, 사유재산권을 가진다는 조항도 존재한다. 수저론은 기본적으로 재산의 크고 작음을 가지고 이것이 부당하다 그렇지 않다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의 기본개념 자체를 흔드는 것이다. 그냥 오며 가며 우스갯소리로 할 주제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의 자본금을 날려먹을 각오를 하고 부채를 지어가면서도 이윤을 창출하는 식당 주인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스마트폰을 그나마 적정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영업적자를 보면서도 나중의 영업이익을 기대하며 꾸준히 연구개발을 하는 애플/삼전 외의 기업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회사들이 스마트폰 공급을 하지 않고 언급한 두 회사들의 독점체제가 된다면 현재의 가격은커녕 공급량 자체도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갑을관계 측면에서 보자면, 나는 이러한 강연을 하는 연사들이 과연 그 갑을관계 계약서를 얼마나 많이 써봤는지 의문이다. 외국회사와 일을 주로 하는 나의 경우는 그 Employer와 Contractor 사이의 계약서를 많이 작성하는데, 제대로 작성된 계약서에서는 꼭 Employer에게만 권한이 있고 Contractor에게만 의무가 있지는 않다. 갑을은 그러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기 위함이지 그 자체가 큰 문제가 되거나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늘 이야기하는 바지만, 한국에서 이상한 갑을문화가 없어지려면 문서화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콜센터에 전화해서 감정적으로 화내지 말고, 그냥 문제가 있다면 이메일을 통해 서면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서로의 과실이 제삼자에게도 확인을 받을 수 있다. 우리 사이에 무슨 계약 섭니까 하며 수억 원이 오가면서도 계약서 한 장 띡 서명하고 말 것이 아니라, 예상되는 현안사항들을 모두 가정하여 기록한 다음 서로 서명을 해야 미래 발생할 불확실한 요인들에 대한 시각차를 서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전지구에 존재하는 그 갑을문화를 없앨 것이 아니라, 을이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문서가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지시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갑도 스스로 자기검열의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갑을관계나 갑질 자체가 우리나라만의 특수성이란 인식은 좀 버리고, 어떻게 평등한 갑을관계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늘 누군가에 갑이 되기도 하고 을이 되기도 한다. 공공공사 도급을 받아 일하는 사기업 직원에게 공무원은 갑이지만,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개인은 공무원에게 갑이기도 하다.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은 선거철이 되면 시민들에게 을이기도 하지만, 평소 앞서 언급한 공무원들에게는 갑이기도 하다.
글이 다소 길어졌는데, 이 거인의 어깨라는 프로그램은 사회현상에 대해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괜찮은 프로그램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꼭 TV를 통해 사회학자나 베스트셀러 작가, 뇌과학자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회사원, 공무원, 학생 들에게서도 더 인사이트 풀한 의견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러한 SNS. 꼭 인생의 낭비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이란 측면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