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백여 년 한국 경제사를 톺아볼 수 있는 좋은 책
한국경제사의 재해석: 식민지기, 1950년대, 고도성장기, 김두얼, 2017, 도서출판 해남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의 경제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들지, 박정희 정부가 아니었다면 한국은 수출지향적 경제개발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견해, 혹은 전후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작금의 한국경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견해들이 그러한 예이다. 그런가 하면 반대되는 진영에서는 식민지 시절 일본의 수탈 때문에 한국의 경제발전은 늦어졌다든지, 60-70년대 대한민국은 누가 조타수를 잡았어도 경제발전을 했을 것이라든지, 미국이 원조 몇 푼주면서 한국을 원조 공여국에 의존적인 경제를 만들어 중간재를 납품만 하는 기지로 활용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어느 쪽이 맞을 것인지에 대해 대화를 해봐도,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부분에만 집중하다 보니 논쟁의 흐름은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끝이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단비와 같은 책을 만났으니, '한국경제사의 재해석: 식민지기, 1950년대, 고도성장기'가 그 책이다. 이 책은 본디 경제학자인 저자가 논문으로 작성한 것을 모은 것으로, 중간중간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회귀분석 자료나 전문용어들의 사용이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저자는 친절하게 왜 그러한 그래프나 표가 나왔는지 설명을 해주며, 매 챕터 결론을 제시하며 전하고 싶은 바를 전달한다. 그럼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바를 몇 가지 적어보고자 한다. 이는 책의 내용을 요약한 바가 아니니 저자의 의도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내가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니 저자의 뜻을 오도했을 수도 있고, 나와 저자의 생각이 상이할 수도 있는 일이다.
책은 먼저 식민지기 생활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남성 행려사망자의 신장 분석을 실시한다. 행려사망자라는 단어가 좀 생소하기는 하지만 무연고 사망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가족, 친지가 없거나 다양한 이유에 의해 인수가 거부된 시체를 말한다. 여하튼 제한된 식민지기 사료 중에 저자가 이 행려사망자의 신장 분석을 실시한 이유는, 그나마 행려사망자는 관보를 통해 꾸준히 광고를 하고, 여기에 신장, 연령 등 사망자 관련 정보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사람들의 생물학적 기록이 남아 있다는 말인데, 이를 통해 저자는 19세기 후반부터 꾸준히 증가해 온 남성 행려사망자 신장 그래프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사실은 몇 가지가 떠오른다. 먼저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시켜서 한국인들의 건강상태나 신장이 높아졌다는 말은, 적어도 19세기 후반부터 이어 온 흐름을 보았을 때 맞지 않는 말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일본이 당시 한국민들을 압제하고 수탈만 했다면 해당 그래프도 다소의 변화는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높아졌고, 노동자의 수 및 기업도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보자면, 사실 식민지기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어 저자는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에 대해 노동생산성 추계를 통해 분석하고, 식민지 조선의 회사 수를 분석하며 식민지 근대화론의 맹점을 지적한다.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흐름은 역사인식의 클리셰 비틀기 수준으로, 책을 읽는 내내 나도 관성적으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 부분이 실제 수치나 기록을 바탕으로 보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후술 하겠지만, 내가 느끼는 저자가 말하는 바는 이러하다. 식민지기를 통해 근대화가 되었다면, 그 전후와 확연한 차이가 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데이터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박정희 정부가 이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켜왔다면, 그 전후와 확연한 차이가 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데이터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존재 자체의 의의도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들만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근대화나 경제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음은 저자가 보여준 역사인식의 클리셰 비틀기의 한 예이다.
우리는 보통 한국전쟁 발발 전, 남한은 농업으로 특화되고 북한은 공업으로 특화되어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더 근대적이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의 '요록(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보자면, 1920년부터 1942년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회사 수가 전국 대비 70%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기를 비롯한 전쟁 전 시절, 남한지역이 북한지역에 비해 근대화가 덜 되었다거나 낙후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식민지기를 넘어서 저자는 제2부에서 1950년대와 고도성장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제1공화국의 재발견이다. 흔히 사람들의 인식 속에 박정희 정부는 능력이 있고 이승만 정부는 무능력한 것으로 인식되는데, 이것도 데이터를 타고 들어가 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전쟁이 종료된 1953년 이후, 우리나라는 전후 복구를 위해 노력을 하는데, 1950년대 후반부터는 전력 생산량이나 산업용 전기 사용량, GDP 증가율, 인구 증가율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다. 저자는 일인당 GDP 증가율은 1950년대 후반 1.6%에 불과하지만, 당시 인구 증가율이 3.2%인 점을 감안한다면(60년대 후반은 1.5%로 감소) 이것도 3%가 넘는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행간을 찾아보려 노력했다. 저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이게 꼭 박정희 대 이승만의 구도나 식근론 대 수탈론의 구도가 아닌,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우상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어느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발전이라기보다는, 어찌 보면 지난 1세기 동안 전반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켜온 우리 국민 전체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일본의 식민지배 이전에도, 그리고 식민지배 기간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근대화를 진행하고 향상되는 생산성으로 기업을 유지하고 있었고,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전쟁복구를 잘 수행하면서도 수출 중심의 개발경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손정목 교수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느낀 바이지만, 우리가 뭉뚱그려 어느 '정부'의 업적이라 하는 게, 실제로 보자면 해당 정부 아래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앙부처 공무원부터 지방정부 하급 공무원까지 이리저리 노력한 것이고, 그에 발맞추어 자신의 인센티브를 충족시키기 위해 투자를 하고 회사를 영업하는 민간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나 싶다. 그렇게 매출과 영업이익을 많이 창출하는 기업이 많아질수록 부가가치세와 법인세와 소득세를 비롯한 세액은 늘어나고, 그러한 세액을 바탕으로 한 정부 재정도 넉넉해지는 게 아닌가 말이다.
책은 이어 대외원조 이야기 및 데이터로 넘어가고, 마지막으로 KDI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개인적으로 현재 근무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일본의 대외원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더욱 흥미롭게 봤는데, 이 부분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우리나라가 받은 ODA의 규모는 절대 규모 차원에서 보면 전 세계 ODA 수원국들 가운데 약 20위 정도의 수준에 속한다. (중략) 그러나 인구 규모나 경제규모를 고려할 때 우리나라가 받은 ODA 수령 수준은 중위권 정도를 차지한다. 이 결과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이 원조를 통한 '큰 밀어주기'에 기인하였다는 명제를 강하게 지지한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규모의 원조를 받은 많은 나라들에게 유의미한 지속적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을 쉽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94
개인적으로 경제성장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하시는 분, 혹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이 이룩한 경제발전을 폄하하시는 분들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개발도상국의 실태를 보여주고 싶다. 절대적인 일인당 GDP 자체가 낮은 나라에서는, 일부 부자들은 잘 살지 모르겠지만, 다수의 빈곤층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지난 30여 년간 인류의 빈곤율은 급속도로 낮아졌는데, 그 낮아진 이유의 상당 부분은 중국의 경제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GDP라 하는 숫자는, 때론 우리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인류의 삶을 매우 변화시키는 숫자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은, 일백 년 전과 같이 남성 행려사망자가 수백 명에 이르거나, 인도나 남아공과 같이 길거리에 슬럼가 아이들이 빵을 달라고 구걸하지는 않지 않은가 말이다.
문득 작년 이맘때 퇴임한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퇴임 고별사(Farewell speech)가 떠오른다. 내가 오바마의 고별사를 들으며 느낀 바는, 그의 낙관적인 미래인식이었다. 다들 선거에 져서, 새로운 신임 대통령 트럼프로 인해 비관에 빠져 있을 때, 그는 과거 미국의 역사를 톺아보며 낙관적인 미래를 살짝 보여주었다.
http://www.latimes.com/politics/la-pol-obama-farewell-speech-transcript-20170110-story.html
그의 연설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We have what we need to do so. After all, we remain the wealthiest, most powerful, and most respected nation on Earth. Our youth and drive, our diversity and openness, our boundless capacity for risk and reinvention mean that the future should be ours.
남들은 미국을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는 미국민들 앞에서,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존경받는 국가라고 말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언젠가부터 사라진 이 애국심이라 하는 것이,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애국심은 어떠한 인물이나 국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우리'나라 국민들로부터 발현된 것 말이다. 오바마가 '내가' 했다고 하지 않듯이, 우리도 '누군가가' 이 큰 경제를 만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느 누군가로 인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좀 탈피할 필요가 있다.
오바마 퇴임식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I am asking you to believe. Not in my ability to bring about change – but in yours.
그는 미국인들에게 믿음을 가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오바마의 능력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능력임을 말이다. 한국 경제사의 재해석을 보며 들었던 나의 생각도 그러하다,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오게 만든 요인은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도 아니고, 박정희 정부의 수출주도도 아니고, 미국의 원조 때문도 아니다. 그러한 요인들도 물론 하나의 이유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나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들이 각자 역할을 잘 해내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조금의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잘 해온 것과 같이, 앞으로는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