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일본제국의 괴뢰국(쉽게 말해 꼭두각시 국가라는 뜻)으로 존재하여, 범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국가의 형태는 아니지만,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입법 행정 사법, 즉 3권 분립이 되어있는 형태의 국가였다. 비록 대부분의 권력은 일본 관동군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이러한 만주국이라는 정부조직의 구성원은 오족 협화(五族協和), 그러니까 일본인, 조선인, 만주족, 몽골인, 한족이었다.
무언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난 2008년 개봉한 영화 놈놈놈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상기 포스터 의상에서 느껴지듯이 만주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 금광과 같이 기회의 땅으로 묘사되기도 했고, 그에 따라 만주 웨스턴이란 용어도 발생하게 된다. 물론 만주 모던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 놈놈놈에서와 같이 금광이나 석유와 같은 기회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고, 실제로 당시 조선에서 만주로 넘어간 195만 명이 이루어 놓은 인적자산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만주국식 에토스가 1960년대 한국 발전 국가의 틀과 환경을 규정했다고 하는데, 이는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 관동군 장교로 근무했던 대한민국 제 5,6,7,8,9대 대통령 박정희를 생각하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박정희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 신중현, 육군 참모총장부터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정일권, 최초의 4성 장군 백선엽, 만주 국립 대동학원 출신 최규하 전 대통령,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만주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을 만들어 간 분들은 많이 계시다.
이게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데, 이렇게 만주국에서의 경험이 있었으니 짧은 시기에 한국을 이렇게 발전시켰다는 관점과, 이런 연유로 건국 초 친일 반민족 행위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관점이 그것일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국가가 건국되고, 경찰이나 군인, 정치 행정 등의 조직을 이루기 위해서 그 경험자를 등용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에 따라 해방 후 군경 수뇌부의 경우 항일 경력자의 비율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대규모 부대 지휘경험이 없는 사람을 일국의 참모총장이나 경찰청장으로 등용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 정부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서의 경력은 친일경력으로 비칠 수 있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당시 조선인이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었던 곳은 사실 일본에서도 한반도에서도 제한적인 수준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국은 그러한 조선인들에게 기회의 장이기도 했다. 재만 조선인의 인구는 1910년대 20만 명에서 1920년대 46만 명, 1930년대 60만 명, 그리고 해방 당시에는 195만 명까지 늘어나게 된다. (p.109) 사람만 많았던 것은 아니고, 이들 중 다수의 고학력 조선인들은 중하 급직 관료, 군인, 노무관리자, 기술자 등 화이트칼라로서 귀중한 현장 경험을 치렀다고 한다. (p.150)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부산의 재발견이다. 부산은 만주국의 발달로 인해 일본에서 만주로 넘어가는 항구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에 따라 부산은 1925~1935년 사이 인구증가율을 무려 74%나 기록했다고 한다. 이때 늘어난 인구와 만주행 물동량을 소화하기 위해 만든 것들이 부산진 매립공사, 도로포장공사, 전차, 부산-해운대 간 철로, 동해 남부선, 부산대교 등이라고 한다. (p.86)
책으로부터 나는 지난 1930년대부터 시작하여 1970년대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역사를 잘 톺아볼 수 있었다. 다만 '5장 건설 시대'의 경우는 내 전공이기도 하여 다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었는데, 저자는 만주국으로부터 시작된 건설의 역사를 조금은 과장되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간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현재 방조제를 축조하여 종합적인 간척사업을 벌이는 나라는 간척의 선구자 네덜란드, 그리고 인천공항과 간사이 공항을 만들어낸 한국과 일본뿐이다. p.333"
하지만 나의 짧은 해외건설 경험을 되돌아보더라도, 60 km2 가량을 간척하여 도시를 만든 홍콩, 팜 주메이라부터 월드 아일랜드, 두바이 마리나 등의 대형 간척사업을 통해 도시를 만든 두바이, 영국 지배 시절부터 150여 년 동안 일곱 개의 섬을 하나로 잇는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섬을 반도로 바꾸어 놓은 인도 뭄바이, 국토의 20% 이상을 간척으로 개간한 싱가포르, 170%의 국토를 간척한 마카오 등 이러한 간척사업은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저자는 더 나아가 울산-언양 간 고속도로를 6개월 만에, 그리고 대전-전주 간 고속도로를 8개월 만에 완공했다고 언급했는데, 이것도 사실관계를 따져봐야 할 만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공사기간이다. 저 고속도로에 터널이나 교량이 존재한다면(사실 고속도로에서 터널이나 교량의 존재는 피하기 어렵다), 해당 구조물 공사기간만 하더라도 족히 6개월은 걸릴 것이다. 콘크리트의 양생기간은 일반적으로 일주일 이상이 소요되며, 하부구조물이 타설 되지 않으면 그다음 구조물은 설치할 수 없다. 못해도 5단, 10단의 교각을 시공하고, 그 위에 상부구조물을 얹고, 다시 아스팔트 포장을 하고, 가로등 전기시설을 설치하는 것은 아무리 24시간 돌려봐야 2년 이상은 걸리는 일이다.
경부고속도로를 언급한 부분으로 들어가자면 조금 더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등장한다. 물론 충분한 Reference를 가지고 작성했겠지만, 아래 언급된 부분은 읽는 이로 하여금 과다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1970년에 428킬로미터의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이것은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공사였다. 연인원 약 900만 명, 총공사비 약 430억 원, 16개의 건설회사와 3개 군 공병단, 건설 중장비 165만 대가 투입됐다. 한국 정부는 1970-80년대에도 여러 고속도로를 닦아 현재 총연장 거리 3천 킬로미터 이상으로 세계 7위의 고속도로 강국에 올랐다. p.329"
그러니까 건설분야에서 투입인원이나 투입장비는 전 세계 어디나 MM(Man-Month), 혹은 MD(Man-Day), 더 세분화하자면 MH(Man-hour)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게 장비로 가자면 EM(Equipment-Month)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한글로 표현하자면 일 투입인원, 월 투입인원 정도 되겠다. 그러니 앞서 언급된 숫자를 다시 보자면, 연인원 900만 명은, 이를 365일로 나누면 대략 24,658명이 되는데, 아마도 대략 일 출력인원은 2-3만 명 내외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혹시나 어떤 사람이 70년대 인구가 3천2백만 명 수준인데, 여기서 노인과 아이를 제외하고 여성을 제외하면 성인 남성 인구가 대략 9백만 명 정도 될 텐데, 국가의 가용 노동력의 전부를 경부고속도로에 쏟아부을 정도의 단군이래 최대 규모 공사로 오독하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건설중장비 165만 대도 그러하다. 대관절 서울통계연보 기준 1970년 전체 서울의 특수차 대수가 6천대 가량이고, 승용차라 할지라도 3만 대 수준이었는데, 165만 대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숫자이다. 이것도 165만 대를 365일로 나누자면 4,520대가 되는데, 이쯤 되면 대략 투입 가능한 수준의 숫자가 드러나게 된다.
만주국을 토대로 시작된 한국의 제3공화국이 대단한 발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건설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게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실제로 이로부터 20여 년 후에 한국의 대우건설은 파키스탄에서 357km 고속도로를 만들게 되는데, 이러한 공사는 사실 예산만 주어지면 유럽이나 미국은 물론, 터키나 인도와 같은 국가 업체들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척의 관점으로 가자면, 홍콩이나 두바이, 싱가포르 마카오 등의 국가는 물론, 호주나 유럽 등의 다양한 국가에서도 이미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는 공사방법이다. 한국은 그 Internationl Reclamation 마켓에서 네덜란드나 벨기에, 그리스 등의 국가보다 결코 앞서 있지 않다.
이러한 디테일에서는 다소 이견이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책을 통해 만주국이라는 또 하나의 우리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언젠가 윤동주 시인은 중국인인가에 대한 논쟁을 본 적이 있는데, 사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그러한 국경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로 인더스 문명으로 잘 알려진 인도의 경우도, 인더스강 문명 유적은 현재 대부분 파키스탄에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물리적 국경으로 인해 현대 인도 공화국의 근원 자체가 인더스 문명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굳이 한반도 자체에서만 우리 역사의 근원을 찾는다는 시각은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라시대 승려인 혜초는 1200년 전 배를 타고 인도 벵골만을 통해 바라나시를 비롯한 다양한 도시를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이란 명저를 만들게 된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과거부터 다양한 국제경험을 통해 우리 문화를 발달시켜왔는데, 그러한 역사의 기원을 찾아 이리저리 찾아보는 것도 우리의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