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고집스럽게 보지 않고 있었다. 봉감독의 필모그라피는 내가 영화를 처음 좋아하던 시점인 플란다스의 개부터 거의 다 봐 왔었으나, 가난을 묘사한 부분이 불편할 것 같아 보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깐느는 물론 오스카까지 섭렵한 이 마당에, 최근 대화를 하다보면 이 Parasite를 모르면 어느 시점에서 무언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대화의 공백이 있다는 점을 느꼈다. 이 와중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딱히 주말동안 어디 밖에 나갈 상황도 안되고, 그래서 유튜브로 결재를 했다. 그래 한번 봐 보자 하고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느낀 점은, 그간 들어왔던 ‘가장 한국적인 것들로 가득찬’이라는 형용의 모순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보여진 미장센이나 오마쥬는, 분명 지난 백여년간 영화계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의 그것들이었다. 하나 하나 내가 느낀 부분만 한번 얘기를 해보자. 물론 스포일러는 있을 수 있다.
영화가 블랙코미디에서 스릴러로 넘어가는 순간인 지하 방공호, 그 어두컴컴하고 직선적인 공간에서 나는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떠올랐다. 문광의 남편 근세의 얼굴은 마치 독일 무르나우 감독의 작품인 노스페라투 포스터 속의 드라큘라가 떠올랐고 지하실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기하학적인 미장센이 떠올랐다.
그런가 하면 박사장네 저택에서 탈출하여 폭우 속에 황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기택 가족의 모습에서는 1925년 러시아 작품인 전함포템킨의 오뎃사 계단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몽타주 기법이 처음 사용된 것으로 유명한 이 영화는 사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영화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사실 극을 만드는 감독 입장에서 이 ‘계단’은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소품의 일종인데, 봉감독과 같이 어떠한 사회 계급을 다루는 경우 이는 긴요하게 쓰인다.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도 박사장의 집을 탈출하며 계단 위로 올라가는 일은 거의 없이 내려가기만 했으며, 전함포템킨에서도 러시아 차르 정부의 군인들은 위에서 아래로 총을 쏘고, 민중들은 계속해서 내려가며 학살을 피해 도망다녔다. 계단의 위는 상류층, 지배층이며 계단의 아래는 하류층, 억압받는 계층이라는 공식이, 시각적으로 관객들에게 은연 중에 내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계단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장면 또한 1950년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오프닝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작비를 생각하면 매끄럽게 비가 오는 장면도 연출할 수 있었겠지만, 감독은 꽤나 어설프고 듬성등성 떨어지는 비의 모습을 연출했다. 고가도로나 옹벽을타고 내리는 비는 마치 일본 폐 사찰의 지붕 아래로 듬성등성 떨어지는 비와 유사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당도한 민택 가족들의 대화에 있어 눈물과 빗물이 범벅된 이 장면은 물론 최고의 장면 중 하나였다. 내려가던 계단 위에 서서 자기 발을 타고 흐르는 물을 거스를 수 없던 장면의 기우의 모습 또한 압권이었다. 물이 계단을 타고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기우 너도 이제 다시 올라갈 수(돌이킬 수)는 없는거야.
영화의 시작과 끝은 피아노 연주곡으로 이루어졌다. 정재일 음악감독은 뉴욕의 오케스트라와 일렉트로닉 음악 등 광폭의 서구음악을 사용하였으며, 스릴러적인 장면에서는 현악기를 통해 영화의 긴박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기택의 전두엽에서는 콘트라베이스를 통해 저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결국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서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할리우드키드로 자라 온 봉감독의 영화는 그렇게 한국적이지 않은, 전세계 영화적 장치와 요인을 바탕으로 기생충이라는 전에 없던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영화를 지배하는 전반의 양극화가 한국적인 것이라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가 다른 나라에서도 환영받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도 그 사회의 양극화를 이 영화를 통해 반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너무 재미있게 잘 봤다. 하지만 이 영화가 한국적이냐 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영화란 장르 자체가 서구에서 발생한 지 백여년 조금 넘은 상태이고, 영화에 사용되는 대부분 기계는 물론 무대적 장치, 연출기법 등도 다 서구권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온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의 경우 역사가 길다 하지만, 실상 작금의 세계적인 감독이라 하는 봉준호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과 같은 분들은 앞서 언급한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이나 구로사와 아키라, 쿠엔틴 타란티노와 같은 거장들의 영화를 보며 꿈을 키워왔을 것이다. 의심가는 분들이 있다면 봉감독의 오스카 수상소감을 다시 한번 봐보시라. 학교다닐 때부터 Martin Scorsese의 quote를 가슴 깊이 새기고, Quentin Tarantino에게 감사하고, 마지막으로 Texas chainsaw로 기쁨을 표현하는 그를 말이다.
폄하하자는 말은 아니다. 나는 사실 현대와 같은 초국적 시대에 살아가면서 어떠한 예술작품이나 테크놀러지에 국적을 부여한다는 것은 꽤나 의미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한국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한국 영화가 깐느와 오스카를 동시에 수상하는 것은 대단히 가슴 벅찬 일이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장 한국적이라는 장점으로 그렇게 되었느냐 하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이 조성해 놓은 문법 안에서 움직인, 다시 말해 한국적이지 않은 영화이기에 오히려 그러한 좋은 평가를 받지 않았나 싶다는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러한다 하지만, 이란 영화, 일본 영화, 쿠바 영화, 인도 영화 등 각국의 영화들은 다 나름의 특색이 있고 보는 재미가 있다. 이러한 국적의 다변화는 물론 환영받을 일이지만, 한국의 영화는 이미 할리우드를 제외하면 거의 세계 최정상급 펀딩이 오고가는 곳이다. 제3세계라 하기엔 너무한 그런 곳.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기생충의 영광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스텝이고, 앞으로도 이어질 순간의 과정이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현재 경제 우상향 수준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깐느 오스카는 물론, 노벨문학상이나 노벨물리학상, 경제학상과 같은 소소한 영광의 흔적은 꾸준히 이어지지 않을까. 모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 20세기 초반부터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일본이 20세기 중후반부터 그러한 흔적을 남긴 것 같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