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퀘벤하운 Jun 12. 2016

[책] 거인들의 몰락; Fall of Giants

백 년 전, 세상이 급격히 변화되던 그 시기의 이야기들

솔직히 학교 다닐 땐 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 읽은 세계 역사만화 전집과 한국 역사만화 전집을 읽은 기억으로 수능까지 간 거 같다. 이과라 뭐 세계사 이런 것도 없었으니, 그다지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우리 때 다행히 수능이 쉬워 사회과목은 고3 여름방학 벼락치기로 문제없이 이수했다. 문제는 국어, 아~)


역사, 그중에서도 세계사에 관심이 가기 시작한 것은 여행을 하기 시작하면서였다. 대학에 들어오고 처음에 도시공학을 전공하여 교수님이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보라고 권했고, 유럽여행을 할 때 이 로마인 이야기는 빛을 발했다. 사실 로마의 메인 유적지 중 하나인 포로 로마노는 막상 가면 돌덩이밖에 없는 지루한 유적지다. 하지만 로마인 이야기를 열심히 읽다 여행을 간 나에겐 그 돌덩이 사이로 키케로와 카이사르가 보였고, 명문 귀족들의 주거지였다는 팔라티노 언덕을 보며 황제가 없던 공화정을 생각했다.


로마는 사실 역사 그 자체로도 매력 있지만, 도시공학을 비롯한 건설인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매력적인 도시다. 일례로 로마 시내 단독주택을 보면 바깥쪽은 폐쇄하고 안쪽의 창만 열리는 부분은 높은 인구밀도 및 기후, 안전을 고려한 주거양식이었다. 대부분의 유럽 주택을 구경해보면 알겠지만, 거리에 보이는 1층 가게, 2-3층 방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연못이나 안뜰이 있다. 이를테면 현대의 주상복합 개념인데, 아트리움, 즉 안뜰은 존재하는 이유는 공간의 사치라기보다는 안쪽의 창에 햇빛을 공급하기 위함이다. 여하튼 당시 이러한 잡지식을 같이 다니던 한국인 민박집 친구들에게 늘어놓기 시작했고, 그들은 다음 날부터 나의 인솔 하에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가이드같이 보였는지, 주변 노란 머리 여인들까지 합류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던 기억이 난다. 연애라는 무림의 세계에 잠시 몸담았던 그때.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니다. 그 치열했던 경쟁이 그다지 그립진 않다 ㅋ)



여하튼 그때로부터 시작한 나의 세계사에 대한 관심은 회사에 들어와 해외업무를 시작하며 조금 더 커지기 시작했다. 중동에 몇 년 거주하며, 중동지역 석유의 역사 및 서구 열강들의 오래된 세력다툼을 알게 되기 시작했다. 이슬람 문화, 그리고 인도의 다신교 시스템 등을 알게 된 것은 현재 날라리 기독교 신자(?)가 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유럽에도 몇 개월 장기출장을 간 적이 있는데, 틈틈이 회의 시작 전 아이스브레이킹 식으로 현지인들과 그곳 역사에 대한 잡담이 마중물이 되어 이것저것 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잡다하게 모은 지식은 역시 장똘뱅이 파편적 지식이라 약간의 한계를 느끼던 중, 책을 통해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역사책 몇 권을 사긴 했으나 그 지루함과 현학적인 단어의 나열에 지쳐 그냥 덮게 되었고, 1차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선 디테일하게 파고들기 힘들었다. 우연히 페북에서 괜찮은 서평을 보고 사게 된 이 책, ‘거인들의 몰락’은 퇴근길 그냥 마음에 들어 서점에서 집어 든 케이스다. 총 두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천 페이지가 넘는 두께를 보고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한두 장 페이지를 읽고 확신이 들었다. “아, 이건 두권 다 사야겠따!” 저자인 켄 폴릿은 정말 이야기를 직조하는 장인이었다.


소설은 웨일스 탄광 동네에서부터 시작한다. 시대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1년부터다. 귀족과 천민이 확실히 구분되고, 여성에게는 참정권도 없었던 그 시대는 바로 현재로부터 고작 백 년 전에 불과했다. 영국에서 시작한 이 소설은 미국과 독일, 러시아로 이어지며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 할 것 없이 유년시절부터 이야기가 진행된다. 귀족과 천민,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을 넘나드는 이런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지, 읽는 내내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사소설을 읽으면 좋은 점이 약간 인생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소설을 읽는 기간은 개인적으로 힘든 사건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스트레스가 나를 가둘 때마다 이 책을 손에 들었고, 열세 살짜리가 탄광 안에서 겪는 이야기를 읽으며 내 스트레스의 가벼움을 조금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이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사실의 나열만으로 점철되었다면 아마 십 몇 페이지를 넘기다 덮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귀족이든 천민이든 그 인생의 디테일을 파고들었고, 물처럼 이어지는 그 디테일 속에 나의 인생과 심리도 엿보였다. 이를테면 광산에 처음 들어간 열세 살 짜리 빌리라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심술궂은 빌리의 상사는 신고식으로 지하 몇백 미터 막장에서 호롱불 하나 없이 하루를 보내게 한다. 탄광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겁을 주는 선배들을 바라보며 빌리는 이러한 생각을 한다. “대개 어른은 아이의 무지를 드러내고 비웃기를 즐긴다는 사실을 빌리는 깨달았다. 자신은 어른이 되어도 그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p.41-1” 중학교에 진학할 때, 대학에 진학할 때, 군대에 갈 때, 회사에 입사할 때, 해외현장을 처음 갈 때마다 느끼던 이러한 선배들의 겁주기 및 신고식에 이골이 난 나에겐 참으로 와 닿는 장면이었다. 나도 빌리와 같이 다짐을 하곤 한다. 새로 온 어린 친구들은 그렇게 대하지 않으리라 하고.


반면 귀족인 피츠라는 등장인물은 또 다른 삶을 살아간다. 먹는 것, 입는 것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온 피츠는 사회에 불만을 가진 하급 계층을 못마땅해하며, 이러한 들끓는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전쟁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게냐는 생각을 한다.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불리는 이 단어는 때론 정말 무서운 단어일 수 있겠단 생각이 퍼뜩 들었다. 소설이긴 하지만 정말 영국의 귀족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귀족은 전쟁이 나면 즉각 전선으로 향해 장교가 되기는 하더라. 하지만 그것이 때론 전쟁을 위한 전쟁을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국왕을 모시고 행사를 진행하던 때에 피츠가 소유한 탄광에선 폭발사고가 났고, 피츠는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한다. 좀 많이 섬뜩한 부분이다.

“피츠는 화가 났다. 사람이 죽는 건 늘 있는 일이다. 전장에서 군인들이 죽고 배와 함께 뱃사람이 가라앉고 열차들이 충돌하고 손님으로 꽉 찬 호텔이 화재로 폭삭 무너지기도 한다. 하필이면 왜 그가 왕을 즐겁게 모시려는 순간 탄광에서 비극적인 사고가 난단 말인가? p.107-1”

피츠 같은 귀족이 전시에 제일 먼저 앞장서는 것은, 인류애나 생명의 소중함은 경시된 명예욕의 일부일 수 있는 것이다.


웨일스 탄광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사라예보의 총탄으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이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사실 사라예보 사건에서 1차 세계대전 시작까지는 약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이 책의 묘미는 그 시간차 동안 존재한 각국 정상들 및 관료들의 이해관계 계산 등 디테일한 이야기에 있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그 피츠라는 귀족은 소설 속 영국의 상원의원이다. 아울러 막상 전쟁이 시작되니 멈출 수 없는 그 전쟁의 속성은 다시금 전쟁의 무서움을 깨닫게 해 준다. 여기서 어느 정도 목표한 바를 달성했으니 정전을 하자는 아들의 말에 완벽한 승리를 얻기 전까진 그만들 수 없다는 독일 측 고위인사의 말을 살펴보자.

“우리는 너무 많은 노력과 돈을 쏟아부었어.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독일 젊은이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뭔가 대가를 받아내야 해. p82-2” 

아울러 영국 측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은 말도 남긴다. 

“다들 왜 싸우기 시작했는지 잊었거든. 이제는 그저 이기고 싶어서 싸우는 중이지. 남자들을 어쩌겠어. 한번 싸움을 시작했다 하면 기를 쓰고 이기려고만 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도 포기할 생각을 안 해. p.123-2” 

평화회담은 물 건너 간 시점이었다.
따라서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그 중간에 평화란 존재하기 어렵다. 인간은 참 그렇게 자신이 똑똑하다고 만물의 영장을 자부하지만 다음 문구와 같이 참으로 나약하고 잔인한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동족을 수백만 단위로 학살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을 포탄 구멍과 가시철조망으로 뒤덮는 유일한 동물이다. p616-1”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소설은 영국과 미국에 이어 러시아의 현대사도 다루게 된다. 물론 러시아의 현대사는 차르에서 레닌으로 이어지는 볼셰비키 혁명이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그냥 단순하게 볼 수도 있는 사건이지만, 책은 또다시 당시 민중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사건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도 비슷한 양상이었지만, 러시아가 붕괴되기 전에도 러시아 민중들은 빵 쪼가리 하나를 얻기 어려웠다. 이와 관련된 묘사는 다음과 같다. 아내가 새벽에 빵을 사러 나가야 한다는 말에 군인인 남편은 부대에 조금 늦게 복귀한다고 하며 자신이 길을 나선다.

“교회 시계가 두 시(새벽)를 알리자 그리고리(남편)는 부츠를 신고 군용 코트를 걸쳤다. 블라디미르(아들)는 편히 자고 있었다. 집을 나와 빵집까지 걸었다. 놀랍게도 이미 줄이 길었다. 좀 늦었군. 그는 생각했다. 백여 명이 줄을 서서 얼굴을 감싼 채 눈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p.173-2”

러시아의 겨울에 새벽 두 시에 나와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벌어진 풍경이다. 심지어 새벽 다섯 시에 열린 빵집은 몇십 명에게 빵을 팔 뿐, 결국 이 그리고리라는 군인은 네 시간을 줄만 서다가 집에 빈 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리의 삶을 살펴보자면, 아버지가 교수형을 당하고, 겨울궁전 밖에서 어머니가 총살당하고, 사제가 어린 동생의 바지를 벗기고, 본인은 공장에서 일하다 경찰에게 두들겨 맞았다. 이러한 일련의 당시 러시아 민중의 삶을 보면, 나라도 무언가 사회주의를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아울러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1차 대전에서의 승기를 잡기 위해 독일이 레닌 임시정부를 지원했다는 얘기다. 적국이었던 러시아 정부를 자연스럽게 무너뜨리고, 프랑스 전선에 몰두하고 싶었던 독일 정부에게 어찌 보면 이는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었는지 모르겠다. 역사는 참으로 그렇게 각각의 이해관계를 통해 톱니바퀴처럼 흘러간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된다.


영국인은 식민지를 지배해도 되고 다른 민족은 안된다는 생각. 이 시절 영국인에겐 당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책의 일부를 소개하자면, 심지어 자메이카가 어디 붙어있는지 모르는(지도를 본 적 없는) 영국의 보통사람들도 자신이 비영국인인 데카르트나 렘브란트, 베토벤보다도 더 뛰어나다고 느꼈다. 이들 모두 학교 다니는 내내 과장된 선전을 듣고, 학교에서는 영국 군대의 승리만 가르치지 패배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런던의 민주주의는 가르치지만 카이로에서의 압제는 가르치지 않았으며, 영국에서 실현되는 정의는 배우지만 호주의 태형이나 아일랜드의 기아, 인도 학살은 알려 주지 않았다. 가톨릭 신도가 신교도를 화형에 처한 일은 배우지만, 신교도 역시 기회만 있으면 가톨릭 신도에게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p.394-2 축약)

여기서 국정교과서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후세에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중고등학생들을 외눈박이로 만드는 역사교육이 과연 그렇게나 중요할까 싶은 생각이 있다. 물론 개인별로 입장은 상이하겠지만, 내가 해외업무를 하고 출장을 자주 다니며 느끼는 바도 앞서 언급한 외눈박이 영국인의 묘사와 비슷하다. 자랑스러운 역사교육에 대해 조금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다.


법정에서 귀족인 피츠와 맞서 싸우는 탄광촌 빌리의 모습은 단연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라 볼 수 있다. 논리적으로 귀족을 이겨나가며 몰락하는 거인(피츠)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카타르시스가 막 느껴지기 시작한다. 물론 세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지만, 강자와 약자의 싸움에서 약자의 편에 서고 싶은 것은 약간 인간의 본성인가 싶기도 하다. 작가가 늘어놓은 일련의 사건들을 밟아 가다 보니 나도 서민인 빌리의 편에 서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이 소설에선 인간의 이중성을 여실히 드러내는데, 여성 인권운동가가 너무 좋아 청혼을 한 현대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회운동가도, 막상 하원의원 후보로 당원들이 아내인 그 여성 인권운동가를 지목하자 그녀를 죽이기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언제나 정의를 외치고, 좋은 방향으로 가고 싶은 인간도 결국 자신의 밥그릇을 침해당하면, 자신이 평생 꿈꾸었던 무언가가 깨질 것 같은 수세에 몰리면 본성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잘 표현한 것도 이 소설이 가진 매력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말이지만 소설의 일부를 잠깐 언급해본다.


“사람들은 누군가 증오할 대상이 필요했고, 언론은 늘 그런 수요를 채워줄 준비가 돼 있었다. p.488-2”

소설은 1920년 1월 16일 자정을 기해 시행된 미국 금주법에 대해서도 약간 묘사를 한다. 그 법에 따르면 알코올이 든 음료의 제조, 운반, 판매는 불법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뉴욕주 버펄로에서 1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밀주를 수입하는 사업은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지하경제는 훨씬 부흥했다. 물론 캐나다 음주 사업은 번창했고, 금주법은 대부 같은 조직폭력배들에겐 낙원의 뱀이 되었다. 때론 그 목적이 깨끗해도 다른 누군가에게 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무리를 지어보고자 한다. 1911년부터 시작하여 1924년까지 십 년 넘는 세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소설은 허구 인물의 디테일과 실존 인물의 사실을 잘 엮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수작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1, 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여성 및 유색인종의 인권은 엄청나게 신장되었다. 백 년 전이면 고작 우리 증조할아버지 정도 수준의 시대인데, 당시만 해도 여성에겐 참정권이 없었고, 유색인종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시대였다. 물론 유대인에 대한 러시아와 독일의 혐오는 누구나 다 인지하는 수준이다. 교과서로만 봐서는 도통 이해가지 않는 부분은 이러한 역사소설을 통해 피부로 와 닿게 된다.


열흘간 백 년 전의 세상을 보며, 백 년 후의 세상을 그려본다. 우리가 현재 당연하다 생각하는 그 많은 명제들은 과연 언제까지 당연한 것이 될까. 조금은 내가 확실히 알고, 믿고 있다는 그 진리와 명제에 대해 조금은 겸손한 자세로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엔 생각보다 절대적이라 할만한 진리는 그다지 많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켄 폴릿이라는 소설가를 알게 되어 참 다행이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세계의 겨울’도 쓰고, 냉전시대를 중점적으로 다룬 ‘영원의 끝’도 발표했다고 하는데, 호흡을 가지고 천천히 그의 소설을 더 탐독해봐야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서평을 통해 소개해 준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거인들의 몰락, 켄 폴릿, 남명성 옮김, 문학동네


매거진의 이전글 [책] 유쾌한 이코노미스트의 스마트한 경제공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