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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만두 Mar 21. 2019

당신의 예수와 부처는 무엇입니까 <우상>

브런치 무비 패스 01  



※ 영화 <우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글을 읽고 보셔도 괜찮은 정도이지만 대사와 스틸컷이 나오니 참고해주세요. 

※ 브런치 무비 패스 #01







칼로 긁은 상처는 치료가 되지마는
 입은 아이 대오. 



입으로 상처를 내서는 아니 돼서 였을까. 아아 이 감독님은 관객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마데카솔을 이렇게도 여러 겹 바른 건가. 러닝타임 내내 대사를 전달하는 방식이 상당히 불친절하다. 의도적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사건이 터지고 앞에서 주인공이 뭐라 뭐라 말을 하는데 옆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키워서 들려준다. 주인공 목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당연히 소리는 오버랩되고 내 귀는 주인공의 말을 쫓아야 할지 엑스트라인 제3자가 말하는 저 대사를 들어야 할지 방황한다. 배우들의 탓도 아니고 음향장비 탓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꼭 들어야 할 대사는 또렷하게 잘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입은 아이 대오 같은) 하지만 아닌 쪽이 더 많았다. 영화 전체를 10이라고 치면 6은 안 들렸다. 


연변(혹은 하얼빈) 사투리 탓도 아니다. 비슷한 사투리를 썼던 영화 범죄 도시를 떠올리면 분명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까지 안 들려주는 의도를 찾아 헤맸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 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자꾸만 어깨가 스크린 가까이 쏠렸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볼 때 누군가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은 같은 처지에 사람에게 그렇다. 학생은 학생에게 엄마는 엄마에게 백수, 직장인, 아빠, 아픈 부모가 있는 자식,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한 사람, 친구가 없는 사람, 돈이 없는 사람, 꿈을 잃은 사람, 꿈같은 건 없는 사람. 나의 처지와 비슷한 사람에게 몰입을 하고 극을 따라 호흡하기 마련이다. 함께 숨을 쉬고 눈물이 터지고 주먹을 꽉 쥔다.


하지만 우상은 달랐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는 누구에게 몰입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권력적으로 강자였던 구명회(한석규)에게도 사회적 약자였던 유중식(설경구)에게도 이야기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듯한 최련화(천우희)에게도 몰입할 수가 없었다. 감독이 내게 묻는 듯했다. 너는 누구를 믿고 싶으냐고. 누구에게 몰입해서 이야기를 따라올래?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에 또다시 선명한 대사를 하나 들려준다. 뭘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우리가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무엇인가. 구명회(한석규)가 유명 정치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아들의 뺑소니를 숨길 것이라는 것? 힘과 돈이 있는 사람은 약자의 목숨 따위는 가볍게 여긴다는 것?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뭔데. 난 그동안 무엇을 믿고 살아왔길래. 무엇을 믿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래서 대사 전달이 불친절했을 것이다. 내가 이만큼만 보여줄 거고 이만큼만 들려줄 건데 여러분들은 무엇을 믿을 수밖에 없는지. 당신에게 이런 상황이 펼쳐지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망적인 상황이 주어진다면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여러분이 그동안 믿어왔던 것들은 무엇을 기반으로 했으며 무엇을 보고 들었기 때문인지 끊임없이 묻는듯 했다. 





영화가 중후반으로 이어지면서 나는 손목에 찬 시계를 계속 확인했다. 어어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 나 아직 답을 못 찾았는데.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답이었다. 사건의 진실과 내면의 본질을 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그것을 주제로 한 이 영화가 어려운 게 당연했다. 결코 쉬워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진실은 원래 그런 거잖아. 정의로운 일들이 쉬웠다면 세상이 이렇게 요지경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 없이 볼 만한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다. 반드시 생각해야 했고 깨어있어야 했으며 끝없이 나 자신에게 너는 누구를 믿고 싶은지 되물어야 했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 나의 삶을 이어감에 있어 내가 어떤 것을 보고 들을지, 그리고 그것들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중요한 메시지였다. 앞이 캄캄할 때 찾게 되는 나의 예수와 부처는 무엇인지 말이다.


불친절함으로써 친절했던 영화 우상. 다소 어려웠지만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이 예측이 가능한 상황에서 나는 누구의 편에 서있을지 궁금하기에. 나는 무엇을 쫓고 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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