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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만두 Aug 24. 2018

프로 걱정꾼의 '야근 준비물'


자정 무렵에 하는지 마는지 모른다고 했던, 미정이었던 태풍 특보가 확정됐다. 느리지만 분명 오고 있는 솔릭이도 무섭고 확정된 특보도 무섭지만 그중 제일은 퇴근 후 그 새벽에 집으로 가는 택시를 내가 과연 잡아탈 수 있는 것인가였다. 자꾸만 택시 하나 없는 텅 빈 사거리만 떠올랐다. 뒤집힌 우산을 부여잡은 채 비바람을 타고 퇴근하는 내 모습도 덤으로 같이. 특보가 무섭다고 말하는 건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업무의 순수 강도가 자리에서 엉덩이 한번 뗄 수 없게 올라가기 때문이고 특별보도인 만큼 아주 그냥 특별하게 호들갑 떠는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바쁜데 사공이 많다. 그 많은 사공이 힘을 합쳐서 배를 산으로 보내버린다. 바다로 헤엄쳐서 나아가기도 바쁜 데.


저녁으로는 칼국수를 먹었다. 바로 어제, 저녁을 못 먹을까 걱정하는 막내에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출근길 그녀의 손엔 까만 봉다리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바나나우유와 맛밤이 야무지게 들어있었다. 그녀의 몸에 나와 같은 걱정 DNA가 흐르고 있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여봤다. 만약 걱정 잘하는 사람을 모아 순위를 매긴다면 아마 이 친구와 내가 지구촌 랭킹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것이다. 아니다 나만 올라갈 듯. 창피해서 막내에게는 차마 말 못 했지만 나의 가방 속에는 사실 분홍색 우비가 들어있었다.



태풍이 지날 땐 우산은 쓰나마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어떤 불확실한 일을 앞두고 마음을 준비할 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가 실망하는 것보다 나쁜 쪽으로 생각했다가 덜 나빴을 때 안도하는 게 나았다. 시간이 지나 그 마음은 점점 커져서는 최대한으로 있는 힘껏 나쁜쪽으로 상상하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그럴수록 감정 소모가 심했음에도 실제로 일이 발생했을 때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격차는 커졌다. 봐봐 역시 나쁜 쪽으로 생각하길 잘했어. 기대했으면 어쩔 뻔했어. 당연하게도 승률?이 높아서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는 오래도록 지속됐다. 그래서 태풍 특보도 크게 걱정했다. 태풍이 수도권을 지난다고 예상한 시간이 나의 퇴근 시간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그 새벽엔 택시가 안 다닐 확률이 현저하게 높았고 나쁜 쪽 두뇌는 폭발해서 회사 수면실에서 자는 모습까지 그려졌다. 걱정 랭커인 나는 출근 준비를 하며 클렌징 폼을 챙겨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예상은 했지만 해도 해도 너무 바빴다. 바쁜 하루에 좋은 점을 굳이 찾아 꼽으라면 시간이 너무 잘 가서 정신 차려보면 퇴근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뭐지 나 방금 출근했는데 퇴근하라네. 이런 기분이다. 칼국수 면을 입으로 말아 넣으며 막내에게 정신 차려보면 우린 인사하고 있을 거니까 힘을 내보자고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힘이 되었을지 공포가 되었을지 잘 모르겠다. 나는 분명 화이팅의 의미였는데.


자리로 돌아와 양치를 하고 손목시계를 풀어 책상 위에 올려뒀다. 거기까지는 정확하게 기억난다. 17시 36분이었다. 그리고 허리가 아파서 이제는 정말 한번은 일어나야겠다 하고 보니 22시 23분이었다. 특보 매직은 대단하다. 입추 매직 뺨친다. 타임머신 타면 이런 기분일 거야.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으며 이제 하나 남았으니 아까 편의점에서 사놓았던 초코우유를 까야겠다 생각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막내가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선배 특보 취소됐대요 했다. 진짜? 하니까 상기된 표정으로 네! 했다. 물개박수가 절로 나왔다. 소리를 빼엑 질렀다. 사무실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역시 나쁜 상황이었다가 좋은 상황으로 바뀌는 건 이렇게 기쁜 일이구나. 부정적 사고에 1점을 올려주려던 찰나 막내가 하는 말이



"선배 말이 진짜 맞았네요. 진짜 대박이에요.

 선배랑 하면 이거 (특보) 안 할 거라고 했던 말이 진짜 맞았어요. 우와 대박 너무 신기해요!"


 




내가? 익스큐즈미 저요? 내가 그런 말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순간 떠오르는 대화가 있었다. 그러니까 편성이 확정되기 전. 자정 무렵 할지 말지 모르겠다던 마지막 특보가 확정되기 전에 대화였다. 태풍도 걱정이고 특보도 걱정하는 그녀에게 내가 했던 말이 있었다. 우리 일이 교대로 돌아가다 보니까 특보도 속보도 솔직히 약간 복불복이 좀 있거든요. 근데 내가 밤에 하는 특보에 아직 한 번도 안 걸렸어요. 오전엔 되게 많았는데 밤 근무 때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나 한번 믿어봐요. 내 운이 쭉 간다면 이거 안 할 수도 있잖아요? 고백하건대 그냥 했던 말이다. 겁먹지 말라고. 너무 걱정하면 실수할까 봐서. 비율로 따지자면 조근때가 훨씬 많긴 했지만 야근러일 때 없었을 리가.


손뼉을 치고 자리에 앉으며 기분이 좀 요란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도 더 좋아질 수 있구나 싶었다. 나에게도 언젠가 역시 좋게 생각하길 잘했어 하는 날이 올까. 걱정 대신에 기대만 가득하며 기다릴 그런 날이. 모든 것은 우연의 연속이었겠지만 어쩐지 뒤통수가 얼얼했다. 본부에서 재차 연락이 왔다. 특보 비상상황 해지되었습니다. 예정이었던 특보는 취소되었습니다. 내일 새벽 특보는 05시입니다.


05시 특보는 원래대로 진행한다는 메시지를 보며 내일 우리팀 조근자들에게 원거리 텔레파시로 힘을 좀 보냈다. 여러분 지금 못 자고 있다면 부디 바로 잠들어요.....내가 아침 근무일 때 오후 10시는 자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잠이 안 와서 결국 스마트폰을 열어보는 시간이기에. 몇 시간 뒤면 이자리에 앉을 팀원들을 위해 졸음이 쏟아져라 기를 보내고 간절히 기도했다. 솔릭아 제발 더 조용히 한반도를 지나가 주련. 남은 업무를 마무리하고 나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마지막 특보가 취소되어 겨우 이 시간이라니. 기함할 타임 워프에 고개를 저었다.


버스나 택시가 아닌 바람 타고 퇴근 할까 봐 걱정했던 것과 달리 태풍은 더 느리게 오고 있었고 회사 근처엔 약한 비만 흩뿌려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사를 정리하며 이미 솔릭이 할퀴고 간 곳들에 더 이상의 피해가 없길 바랐다. 혹시 오늘 나의 운이 먹히는 날이라면 이것도 좀 통하기를. 송두리째 뽑힌 나무 사진을 바라보며 컴퓨터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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