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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만두 Aug 24. 2018

오른발과 밀크티


지하철 문이 열리고 내리려는데 발바닥에 하얀 무언가 따라왔다. 누가 뱉은 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에서 나와 함께 하차하겠습니다. 껌아 너는 어디서 왔니. 광화문은 처음이지? 미간을 한번 찌푸리고 신발 바닥에 붙은 껌을 떼어냈다. 계단을 올라와 카드를 찍고 출구를 향해 터벅터벅 걷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우리 팀 전우였다.


□□님! 하고 부르며 달려가 인사를 하려는데 까칠하게 올라온 수염이 보였다. 헐 괜찮아요? 묻자 그는 허허 웃어 보였고 나도 그냥 허허 웃었다. 그래 긴말해 무엇하리 님 마음이 내 마음인 것을…예정된 교대 시간보다 일찍 퇴근하는 거 보니 사무실은 아수라장은 아니겠네 싶었다. 건전지를 갈아 끼우듯이 교대 안 해도 된다는 건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는 걸 테니까. 그들이 이유 없이 일찍 퇴근시켜줬을 리 없다. 오늘처럼 비가 오던 몇 년 전 어느 날 빗길에 크게 넘어진 선배가 급작스레 퇴근하게 되었을 때도 넌지시 출근 걱정부터 했던 그들이다. 새벽에 출근할 때 택시가 잘 잡혔는지 물어봤더니 안 잡힐 줄 알고 일찌감치 나왔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잡혀서 4시 10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고 했다. 역시 내 전우답다. 당신의 걱정력을 응원합니다. 


헐....빨리 집으로 가서 쉬세요. 궁금한 이야기가 열 보따리는 있었지만 나중에 풀기로 하고 우선은 당장이라도 코피를 쏟을 것 같아 보이는 그를 개찰구로 떠밀었다. 나 역시도 어제의 피로가 전혀 안 풀린 상태여서 전우의 피로감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4시에 출근한 그의 피로는 내 것이 아니었지만. 이것이 너의 피로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너의 피로냐. 그것도 제 것이 아닙니다. 착한 아이로구나 모두 다 너에게 주겠다. 근본 없는 상상을 하며 남은 계단을 마저 올랐다. 








직장인의 생명수인 커피를 한 잔 사서 들어가려고 근처 카페로 가는데 뭔가 풍덩. 오른발이 차가웠다. 아까 껌 밟은 그 발이 비가 와서 고여있는 물웅덩이에 빠졌다. 그것도 까만 흙탕물. 이야 오늘 내 오른발 재밌네. 막 끈적한 것도 차가운 것도 다 밟아버리네. 다음엔 뭐 밟을 건지 힌트라도 좀 주라. 아메리카노를 마시려고 했던 계획과 달리 밀크티를 주문했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설탕이야. 





주문해놓고선 카페에 있는 휴지로 다리에 튄 흙탕물을 닦아냈다. 사이즈업 까지 한 밀크티를 한 손에 들고 출근을 해보니 예상대로 너무나 평온했다. 그럼 그렇지 사람이 쉽게 변하면 뭔 일이 나도 난댔어. 근데 여기는 조금 나도 괜찮을 것 같네.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생각을 주워담으며 흙탕물 묻은 신발을 닦았다. 그러고 보니 이 신발이 수고가 많았다. 얼마전 공사 중이던 어느 시장길 아스팔트도 밟았었는데. 굳기 전 아스팔트는 엿가락처럼 죽 늘어났고 어딘 가에서 알 수 없는 흰 연기가 계속 나왔다. 연신 기침을 해대며 전쟁통 같은 그곳을 지나며 아끼는 건데 잘못 신고 나왔다고 생각했던 그 신발이다. 한 철만 신으려고 저렴하게 구입한 샌들이 가격대비 꽤 튼튼하네. 내년에도 그곳에서 신발을 사야겠다 다짐했다. 


오른발이 밟은 것은 여기까지다. 껌과 물을 밟았고 밀크티와 단골이 될 신발 가게를 얻었다. 오늘도 이렇게 사소한 것들에 의미부여를 하며 업무를 시작해본다. 사소한 것들은 언제나 내 곁에 있다. 내겐 평범한 하루가 가장 어렵고 사소한 것들의 무게가 더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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