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boutseohyeon Nov 21. 2024

[소설가의 콘텐츠 읽기] 끈질긴 의심

-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이 글에는 드라마의 온전한 내용이 아닌 정황상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작이다. 

 이런저런 평들을 제쳐두고 너무 좋은 작품이라는 말부터 내뱉는 건 결코 쉽사리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더군다나 어떤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지 전부 파악하기조차 쉽지 않을 만큼 많은 작품들이 쏟아지는 시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진짜 좋은 작품을 보고 싶다고 한다면 기꺼이 이 작품을 추천하려 한다. 분명 이 작품에는 그렇고 그런 추리물을 넘어서는 무언가 있다.  


 드라마의 시작점,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를 향한 불평 중 하나는 화면이 너무 어둡다는 것이었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다다르는 순간, 그 의문은 해소된다. 어째서 그동안 집이 그토록 어두워야만 했던 것인지. 그 어둠이 말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어둠이 지나갈 수 있는 것인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를 드리우고 있는 가장 큰 정서는 의심이다. 물론 추리서사에서 의심은 필수 요소이다. 미스터리를 끌고 가는 힘은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묻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작품이 말하는 의심은 단순히 사건 해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의심이 피어났을 때, 우리는 그 의심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묻는다. 


 여기서, 드라마를 향한 불만을 또 하나 마주할 수 있다. “왜 말을 안 해? 제발 서로 대화 좀 해라.” 멀리서 보는 시청자들은 알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하는 의심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 정도는 설명해주지 않아도 안다. 그러니 너희들이 대화를 하고 우리에게도 숨은 진실을 좀 알려 달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주인공 부녀는 끝까지 마지막에 남아 있는 의심의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다. 의심을 해소해 주길 바라면서도,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고 할퀴고 끝내 돌아선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하나의 의구심을 던진다. 어쩌면 우리는 의심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의심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믿음이다. 가장 소중한 이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불신이야 말로 괴롭게 하는 거라고. 스스로 지옥에 빠지지 말라고. 

 늘 그렇게 배워오고 믿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전제는 반박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믿음을 주지 않는 존재에게 어떻게 믿음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의심할 만한 합당한 근거가 있지 않은가. 그 근거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극 중 한석규는 자신의 딸을 향한 의심을 풀지 않는 후배 경찰 한예리에게 말한다. 의심해도 좋다고. 하지만 의심하기 전에 그 의심을 확신하는 자신부터 의심해 보라고. 그 순간 한석규는 딸을 향한 의심을 완전히 지운 상태처럼 보인다. 드라마 속 수없이 나는 너 믿는다고 말하던 그 말이 바람이 아닌 진심이었던 것 아닐까. 딸이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적어도 살인자가 아니라는 건 확신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드라마는 무조건적 믿음이 의심을 거두는 길이라 말하지 않는다. 딸이 진짜 범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다가가는 순간, 한석규는 막아서며 말한다. 오랫동안 자신이 붙들어 왔던 의심, 그 의심을 결국 입 밖으로 내고 만다. 


 네가 하준이를 죽였냐고. 


 동생의 사고사에 배후에 네가 있는 것이냐고. 자신을 버렸지 않냐고 묻는 딸에게 버린 게 아니라 의심을 확인할 용기가 없어서 도망쳤던 거라고. 이제와 묻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그 질문에 이르러서야 의심의 고리는 비로소 끊어진다. 


 나의 의심이 타인에게 전가되고, 그렇게 전가된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그럼에도 믿음을 택하였을 땐 이미 늦어버렸을 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지난 의심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 것인가. 그러니 이 작품은 다시 한번 묻는다. 의심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있느냐가 아닌, 네가 품은 의심을 확인할 수 있는 용기가 있냐고. 


 의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조건적 믿음도 확실한 사실도 아니다. 그 의심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주한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설령 그것이 얼마나 아프건, 얼마나 불편하건. 그렇게 마주한 곳에서 끝내 확인한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심이 걷힌 곳에서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소설가의 콘텐츠 읽기]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