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룸 넥스트 도어>
어쩌면 인생에서 확실한 건 하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알 수 없지만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그 확실함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마치 내게는 아니 아직은 오지 않을 것처럼.
페드로 알모바르 감독의 <룸 넥스트 도어>는 죽음에 대해 그리는 영화다. 불현듯 찾아오는 죽음은 일상에 화려한 순간에 마치 아무렇지 듯 쓱 다가와서 삶을 흔들어 버린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이라는 것.
줄리안 무어가 연기한 잉그리드는 잘 나가는 소설가이다. 사인회를 하는 와중에 친구의 방문을 받게 되고, 그 친구로부터 다른 친구, 틸다 스위튼이 연기한 마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잉그리드는 당연히,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마사의 병문안을 가게 된다. 그렇게 잉그리드 앞에 죽음이 찾아온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 마음을 책으로까지 집필한 잉그리드에게 죽음 앞에서 이제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전쟁터에서 기자 생활을 한 마사는 죽음을 앞두고 이미 한 차례 전쟁을 치렀다. 죽음을 택하는 대신 신약 실험을 했고, 기대와 달리 치료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마사는 더 이상의 전쟁을 치를 수 없다는 듯 삶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다크 웹을 통하여 약을 구하고, 집이 아닌 별장을 빌려두고,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줄 친구를 구한다. 그리고 몇 차례의 거절을 거쳐 그 부탁은 잉그리드에게 이른다.
죽음의 순간 곁에 있어 달라는 것이 아닌, 이 전까지의 순간을 함께해 달라는 것.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잉그리드는 거절하지만, 차마 딸에게도 손을 내밀지 못하는 마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렇게 위험한 부탁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영화 속에는 격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차분하게, 한 걸음씩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렇게 죽음은 어느덧 곁에 와버렸다.
매일 밤 문을 열어두고 잘 거야, 어느 날 문이 닫혀 있다면 신호로 받아들여줘.
영화의 진가는 여기서부터 발휘된다.
마사의 죽음은 분명하면서도 불분명하다. 우리는 잉그리드가 되어 마사가 언제 결심을 하게 될지, 혹여나 결심을 바꾸진 않을지, 결심을 행하기 전에 죽음이 찾아와 버리는 건 아닐지, 그 이후에는 어떻게 흘러갈지, 고요한 폭풍 속에 갇혀 버린 것만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린다. 화를 낼 수도 마음껏 울 수도 없고, 결국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다며 편안한 상태에 이르지도 못한다. 태연하게 잉그리드의 시간까지 망치고 싶지 않다며 편하게 지내라고 하는 마사의 말 앞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마는 것이다. 어떤 고요함은 격동보다 두렵고 잔인하다.
<룸 넥스트 도어>에는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죽음 앞에 지난 삶에 대한 후회로 얼룩진 통곡도, 묵은 상처를 풀어내는 회포의 시간도, 죽음 앞에 시간을 내어 달라고 구걸하지도 않는다. 피할 수 없기에 피하지 않고, 담담할 수 없기에 담담하다. 설령 누군가에겐 비난받을 선택이라 할지 라도, 그 선택 앞에 도망치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영화는 끝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기품 앞에 다시 한번 묻게 된다. 과연 죽음은 무엇일까 하고. 마지막 순간, 과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몇 번이고 곱씹게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