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회사는 웹 에이전시면서 동시에 온오프라인 디자인을 잘하는 곳이라 종종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드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덕분에 나도 가끔씩 내 본업과는 조금 결이 다른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디자인 작업 요청이 들어왔다. 스페인에서 열리는 국제 규모 행사에 납품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나라 스페인, 그리고 바르셀로나. 친구와 첫 해외여행지이면서 동시에 신혼여행으로도 방문했던, 사연 많은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라니 더 반갑게 느껴졌다.
내가 맡은 업무는 디자인된 이미지를 웹브라우저에서 볼 수 있게 변형하는 작업. 원래 나의 주 업무와 겹치는 부분이 많은 덕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처음 프로젝트를 받았을 때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워 까마득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한두 번 해보니 노하우가 생겼고, 이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리 준비해둘 정도로 능률이 올랐다.
큰일은 늘 방심할 때 터진다. 나는 이번에도 과거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미리 틀을 잡아 놓고 디자인만 나오길 기다렸다. 이미지를 갈아끼고 코드 몇 개만 수정하면 되도록 준비를 단단히 해뒀다. 그게 요즘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나만의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역시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마치 신이 나를 조롱이라도 하고픈 것처럼 내가 세운 모든 계획은 어긋났다.
'이거 영상으로 해주실 수 있죠?'
디자인 최종 컨펌 직전, 클라이언트가 돌연 발표 형식을 바꾸겠다고 전해왔다.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자동으로 재생되는 전시용 영상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꼴이었다. 동남아 리조트로 휴가를 떠나는데 스키 장비를 준비한 경우랄까? 그동안 준비한 것들이 아쉽게 되어버렸다. 게다가 나의 주 업무와는 동떨어진 영역으로 일이 전환돼 꽤 당혹스러웠다.
그렇다고 상황 탓만 하며 불만만 쏟아내는 건 우리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다고 행사 시간이 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왕이면 행사에서 우리가 만든 영상이 멋지게 상영됐으면 하는 새로운 기대와 함께 우리는 빠르게 작업을 전환했다.
작업하는 동안 나는 무척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초보적인 실수도 많이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허비시켰다. 그러나, 그럼에도 누구 하나 화내지 않았고, 짜증 한 번 안 냈으며, 한숨이나 불만을 내놓지 않았다.
이때 나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하나는 내 실수에 대한 부끄러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멋진 동료와 함께할 수 있다는 감사함이었다. 내가 그동안 쌓은 공덕이 그렇게 많았나? 아니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베풀고 살라는 뜻인가? 내 인생에 이런 멋진 사람들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무척 행복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클라이언트의 변덕은 이쪽 업계에선 낯선 일이 아니다. 그들이라고 대행사를 골탕 먹이겠다고 자기 시간까지 낭비하겠는가. 누구나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법이다. 그런 일에 일일이 감정 소모를 하다간 화병으로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건 '어떻게 일하는가'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떤 태도로 일을 대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우리 팀의 태도가 참 좋다. 어떠한 일에도 자신감과 열정을 잃지 않고 겸손과 칭찬, 그리고 감사할 줄 아는 모습에서 무척 큰 경외를 느낀다.
프로젝트의 끝에서, 클라이언트보다 내가 더 많은 걸 얻은 기분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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