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났다. 어머니는 최근 힘든 일이 있으셨는지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최근 학교 실습을 받느라 고생 중이시라는 어머니. 늦은 나이에 대학 교육을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신듯하다. 학업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텐데, 치매 증세가 있는 할머니를 돌보시기까지 하니 참으로 고단하고 바쁘신 나날을 보니고 계신 어머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렇게 정신없는 틈 속에서 보이스피싱 악당들이 어머니께 접근했다고 한다. 이 악랄한 자들은 나날이 수법이 발달하는데, 이번에 어머니께 시도한 수법은 너무나도 교묘한 탓에 젊은 나조차도 자칫 방심하다간 당하겠구나 싶었다.
나는 어머니의 개인정보가 얼마나 유출됐나 염려되어 통화 녹음을 확인해 봤다. 불행 중 다행으로 어머니는 비밀번호 같은 결제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는 넘겨주지 않았다. 하지만 주소나 이름 생년월일 등을 넘겨주었고, 그것이 추후 2차 범행에 이용될 우려를 남겼다.
보이스피싱 악당들의 수법은 이러했다. 그들은 우체부로 위장해 어머니께 접근했다. 현재 신용카드를 배송 중인데 뭔가 사고가 난 것 같으니 빨리 조치를 취하라고 말했다. 마치 어머니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긴급한 척 닦달하며 사람 속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장 우체부는 자신이 신용카드 뒷면에서 고객센터 전화번호를 발견했다고, 전화번호를 불러줄 테니 빨리 전화해 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 밖에 이동 중이라 번호를 잘 못 알아듣겠으니 신용 카드 뒷면을 찍어서 문자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시스템상 그럴 수 없다며 한사코 전화번호를 받아 적으라고 닦달했다.
어머니는 잠시만 기다려달라 하고 메모지와 펜을 구해와 고객센터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그 뻔뻔한 위장 우체부는 전화를 끊는 순간까지 자신의 배역에 충실했다. 공무원 특유의 사무적인 태도와 친절함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묘한 분위기를 살리는 마무리 멘트까지 남기며 자신의 역할을 마쳤다.
이어지는 가짜 고객센터와의 전화에서 어머니는 개인정보를 술술 쏟아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보통 이런 상황에서 고객 정보를 확인해야 상담이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인 터라, 직원이라는 사람이 달라는 정보는 의심 없이 내주었다.
그러나 '될놈될'이라고 했던가. 천만다행으로 어머니께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겼고 어머니는 그 가짜 직원에게 잠시 뒤에 다시 전화를 걸겠노라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다행히 그때까지 비밀번호나 다른 어떤 중요 정보도 말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어머니는 급한 일을 처리하고 다시 전화기를 집어 들었고, 문자 한 통이 와 있는 걸 확인했다. 문자 메시지는 SKT에서 온 것이었는데, 평소라면 확인하지 않았겠지만 그날따라 왠지 열어보고 싶었다는 어머니.
어머니는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드셨다고 한다. SKT에서 보낸 메시지의 내용은 다름 아닌 '최근 급증하는 우체국 직원 사칭 보이스피싱 사례'에 대한 것. 그 메시지 안에는 보이스피싱 일당들의 카드 발급 시나리오가 자세히 적혀 있었고, 어머니는 하마터면 자신이 그 시나리오대로 속아 넘어갈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두려워하셨다.
평소에 피싱 방지 교육을 많이 들으시고 자율방범대 활동도 하며 범죄 예방에도 적극 참여하시는 어머니인데, 이렇게 한순간의 방심으로 범행에 당할 뻔한 상황을 겪고 나니 느끼는 바가 크셨다고 한다.
게다가 그 순간 어머니를 구해준 그 문자가 참 고맙고도 신통하다. 단순히 운이 좋아서 그 시간에 그런 문자가 온 건지, 아니면 SKT가 피싱에 사용되는 전화번호 패턴을 인식해 해당 번호로 발신하면 문자를 보내주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덕분에 화를 면했으니 SKT 만만세다.
그 뒤로 부모님과 나는 또 다른 패턴의 범죄나, 발전하는 AI 기술이 가져올 명과 암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한참 동안 대화를 이어나갔다.
부모님의 연세가 늘어날수록 사이버 범죄에 취약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최근 통신사에서도 AI를 도입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고 들었는데, 비즈니스 영역뿐만 아니라 범죄 예방 기술도 하루빨리 개발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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