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텔레비전을 틀면 회색 바탕에 검은 도트가 지지직거리며 나타나는 화면을 자주 마주했다. 우리 집은 유선 방송이 없었고, 지붕 위 낡은 안테나에 의지해 방송을 받아야 했기에, 신호가 약한 순간이면 어김없이 그 회색 소음이 들이닥쳤다. 불행히도 내가 살던 동네는 전파가 잘 잡히지 않는, 도시의 그림자 같은 난시청 지역이었고, 그만큼 나는 지지직거리는 화면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지루하고 성가셨던 그 화면을 나는 어느 날 호기심을 담아 바라보았다. 혹시 저 도트들 사이에, 무엇인가 숨겨진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두들기던 텔레비전을 멈추고, 나는 조용히 그 점들의 깜빡임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분명 그 안에 어떤 규칙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어린 마음으로 며칠이고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허탈했다. 나는 아무 패턴도, 아무 비밀도 찾지 못한 채 포기했다. 그리고 그 즈음, 우리 집에도 케이블 방송이 들어왔다.
불확실한 것에서 규칙을 찾겠다는 마음은 어쩌면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어리석음을 몰랐기에, 오히려 열심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실패로부터 나는 멈추지 않는 관찰의 습관을 얻었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고 살피는 일에 익숙하다. 특히 사람, 인생의 많은 시간을 사람 보는 데 사용했다.
사람은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런 선택을 할까. 겉으로 드러난 사소한 움직임, 표정, 말투, 옷차림 속에 숨겨진 마음을 추적하려 했다. 감정에는 패턴이 있고, 선택에는 논리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진학은 실패했지만, 관심은 놓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란, 어쩌면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 화면 속 도트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무리 들여다봐도, 규칙이라고 부를 만한 건 없어 보인다. 내가 한때 그 도트를 해독하느라 시간을 낭비했던 것처럼, 사람이라는 미지의 화면을 읽으려 했던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는 그들에게 직접 묻지 않았다. 그저 내 안의 기준으로 해석했고, 때로는 예단했다. 관찰이라기보다는 혼자만의 어림짐작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결단했다. 추측만 무성한 관찰은 이제 멈추기로. 그 시간과 에너지를 이제 나 자신에게 쓰기로 했다. 남의 눈을 읽는 데 쓰던 집중을, 내 안의 의도와 감정, 행동을 이해하는 데 쓰기로 했다. 제3자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되묻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짜 성찰이라 믿게 되었다. 그리고 더는 타인의 마음을 꿰뚫겠다는 오만을 품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가능하다 해도 누군가의 마음을 멋대로 넘겨짚는 건 결국 불쾌함을 남기는 일일 테니까.
사람은 자연이라는 커다란 운명 안에서, 우연처럼 흩어진 존재다. 그 우연 하나하나를 붙잡기보다는, 자연이라는 흐름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더 깊이 바라보고 싶어졌다. 이제는 그저 지지직거리는 화면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아이를 보내고, 내 안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살면서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합니다.
오제이의 <사는 게 기록> 블로그를 방문해 더 많은 아티클을 만나보세요.
https://blog.naver.com/abovethesurf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