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방문 마지막 날, 나는 용두산에 올랐다. ‘산에 올랐다’는 말에 진짜 등산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부산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해하기 쉽다. 용두산은 산이라기보다 언덕과 오름의 중간쯤 되는, 그저 조용한 뒷동산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방문객들이 그 조그마한 언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름부터 화려한 다이아몬드 타워, 오래도록 부산 타워라 불리던 그 하얗고 날렵한 타워에 올라 부산 시내를 내려다보기 위해서다.
나는 20여 년 전, 전국 일주 중에도 용두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타워는 이용하지 않았다. 잠깐 머물다 오는 데 비용을 들이기엔 아깝기도 하고, 흐린 날씨에 가시거리도 짧았으며, 용두다방이 있는 2층 벤치에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경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팔각정 모양의 건물 2층에 올라 남포동과 남항 쪽을 바라봤다. 물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모를 희뿌연 안개가 고요하게 내려앉은 풍경 속에서 탁 트인 상쾌함은 느낄 수 없었지만, 마치 계곡에서 불어오는 듯한 선선하고 촉촉한 바람이 나를 감쌌다. 그 바람 덕분에 마음만큼은 유난히 맑고 평화로웠으니, 나는 충분히 편안했고, 충분히 행복했다.
초록빛 철제 벤치에 앉아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이 조용히 일어났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행복이라는 감정이, 평화로운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께름직함이 공존하는 불안정한 이 느낌이, 어디선가 경험해 본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군 복무 중, 힘든 작업을 하다 잠시 맞은 휴식 시간. 멀리 북녘의 산을 바라보며 느꼈던 정적 속의 묘한 평온이 떠올랐고, 스무 살 무렵 연회장 일을 하던 시절, 비상구 계단에 앉아 도시 위로 스며드는 고요한 밤공기를 마시던 기억도 불쑥 나타났다.
그때와 지금은 시간도, 공간도 닮은 데가 없는데도, 어째서 비슷한 감정이 자꾸만 불쑥 떠오르는 걸까.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들의 패턴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어느새 사색으로 이어졌고, 나는 내 기억의 파편들을 더듬으며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의외의 결론에 다다랐다. 행복이란 참으로 일시적이고, 형태도 없으며, 아무런 규칙도 없는 감정이라는 사실. 그것은 불안과 마찬가지로, 잠깐 머물다 어느새 사라지는, 들쑥날쑥한 감정의 조각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었다.
‘행복은 순간이며, 곧 사라질 수밖에 없는 필멸자구나. 그런 행복을 좇는 일은 무지개의 시작점을 찾는 일처럼 덧없고 부질없는 일이겠구나.’
그 생각에 이르자 마음 한쪽이 왠지 개운하면서도 쓸쓸해졌다. 마치 다 키운 자식이 시집가는 날, 뿌듯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엇갈리는 그런 순간처럼. 그렇다고 해서 행복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아니다. 다만, 더는 그것을 목표나 목적으로 삼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그저 삶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부산물 같은 감정이라는 걸 받아들이자, 마음은 더 평온해졌다.
그런 마음을 안고 남포항을 향해 있던 고개를 거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어지러웠던 생각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서울에서 마주할 순간들과 풍경들에 문득 설렜다. 어쩐지, 다음 주에는 뭔가 더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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