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으로 푹푹 찌는 걸 보니 곧 장마가 시작될 모양이다. 아직 공식적인 열대야는 아니지만 밤에도 더위가 식지 않아 에어컨을 켜고 지낸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본격적인 장마가 닥쳐봐야 알겠지만, 이번에는 큰 비가 예고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강수 예보가 자주 빗나가 기상청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쳤었지만, 요즘 들어선 비교적 잘 맞아서 비 맞고 다닌 적이 거의 없었다.
아내도 기상청 예보를 믿게 되었는지 이번 장마를 대비해 새 장화를 준비했다. 오래된 장화는 처분하고 귀여운 새 장화를 한 켤레 장만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주문량 폭주로 예약배송을 해야 한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기상청 민심이 돌아왔구나, 사람 마음이란 게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장화가 곧 도착할 예정이라, 우리는 오래된 장화를 정리하기로 했다. 장화는 자주 신는 신발이 아니고, 우리 집 신발장도 이미 포화 상태이기에 여분을 둘 이유가 없었다. 나는 보통 신발이 필요 없어지면 상태를 불문하고 과감히 버리는 편인데, 아내는 반대로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물건은 중고로 팔아 군것질값이라도 챙기는 쪽이다.
이번에도 아내는 장화를 중고 장터에 올렸다. 장마철이기도 하고 브랜드도 좋은 편이어서인지 반응이 뜨거웠다. 글을 올리자마자 연락이 빗발쳤고, 흥정도 필요 없이 거래가 순식간에 성사됐다. 구매자는 처음에는 다음 날 저녁에 오겠다고 했다가, 아침으로, 다시 그날 밤으로 약속을 계속 앞당겼다.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중고 거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건 괜찮지만, 그 사람이 내 물건을 앞에 두고 흠을 찾으려는 순간을 견디기 어렵다. 예상치 못한 흠집이 드러나면 가격을 깎거나 거래가 무산되기도 하는데, 그러면 들인 시간과 정성이 허무해진다. 큰돈을 벌려는 게 아니었기에 더 아깝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는 오래도록 누군가의 평가를 견디기 어려워했었다. 특히 20대엔 그 감정이 절정이었다. 누구도 내 작품을 평가할 수 없고, 나 역시 하나의 작품이므로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는, 엉뚱한 예술가병에 걸려 있었다. 그런 삐딱한 태도는 자신감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 능력의 부족함을 알기에, 그걸 들킬까 봐 평가의 기회 자체를 없애려 애썼다. 아둔한 시기였다. 더 많이 드러내고 더 많이 평가받을수록 성장도 빨라지는데, 나는 꽁꽁 숨어 있었으니, 느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내는 나와는 달리 중고 거래를 하는 데 거부감이 없다. 아니 어쩌면 거부감이 없는 걸 넘어서 자신감이 넘치는 편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팔 게 있으면 자기에게 다 가져오라고, 뭘 가지고 와도 팔 수 있고 말하는데, 실제로 여태까지 중고장터에 올려서 재고가 남은 적이 없는 걸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닌 것 같다.
거래 당일 밤, 아내와 구매자는 노란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번지는 동네 공원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 어귀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구매자가 나타났고, 두 사람은 조용히 인사를 나누며 물건을 주고받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무언가를 거래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구매자는 직장에서 퇴근하자마자 달려온 듯, 숨을 몰아쉬며 도착했다. 아내가 계좌번호를 알려주자마자, 그는 재빨리 송금했다. 방금 구운 고구마를 받듯, 숨 돌릴 틈도 없이 돈부터 보냈다. 돈을 보내고 난 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내가 “안 열어보시나요?” 하고 묻자, 그는 “어차피 만오천 원밖에 안 하는데요” 하며 웃고는 사라졌다.
아내는 내게 오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오천 원 더 부를 걸”이라며 투덜댔다. 거래를 준비하면서 장화를 깨끗하게 닦고, 원래 받았던 상자에 곱게 담아 정성껏 포장했다. 구매자가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새 상품처럼 준비했는데, 그 마음을 열어보지도 않고 돌아가니 좀 허무했던 모양이다.
나는 오히려 그 장면이 좋았다. 흠을 찾으려 들지 않고, 서로 믿고 물건을 주고받고, 쿨하게 헤어지는 게 훨씬 기분 좋은 일 아닌가 싶었다. 어차피 서로의 목적은 충분히 이뤄졌으니까.
장마가 오고 있다. 지난 장마엔 슬리퍼를 팔았고, 이번 장마엔 장화를 팔았다. 우리의 물건을 이어받은 이들에게 맑고 시원한 비가 내려주길, 그들의 장마철에도 행운과 건강이 함께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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