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됐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 무렵부터 비는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 우수관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둔탁하게 이어졌다. 규칙적이고 묵직한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도 덩달아 차분해졌다. 아침에 눈을 떠 일기예보 앱을 확인했다. 시간표 전체에 빽빽하게 떠 있는 비구름 아이콘. ‘하루 종일 비겠구나.’ 나는 비에 젖어도 금세 마르고 비치지 않는 옷을 골랐다. 겉으로 보기엔 어제와 다르지 않은 차림이지만, 나름의 방어막을 갖춘 셈이었다.
현관문을 살짝 열어 비의 기세를 가늠해 봤다. 해가 뜨기 전이라 눈으로는 알기 어려워 복도 밖으로 팔을 쭉 뻗었다. 손바닥 위로 듬성듬성 묻는 물방울. 아직은 요란하진 않구나. 이 정도면 3단 우산이면 충분하겠다 싶었다. 우산을 가방에 밀어 넣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산뜻한 출발이었다.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하늘은 참을성 있게 비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릴 즈음, 마치 기다렸다는 듯 폭우가 쏟아졌다.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동그랗게 퍼지며 퐁당퐁당, 그 울림이 괜히 아름다워 보였다. 출근길은 마치 전시회 같았다. 반사된 신호등 불빛, 하늘을 향해 뻗은 우산들,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기둥. 나는 자주 걸음을 멈췄고, 종종 셔터를 눌렀다.
종로에서 을지로 방면으로 걷다 보면 청계천이 나타난다. 도심을 좌우로 관통하며 나아가는 푸른 나무들이 회색 빌딩 사이에서 색을 보탠다. 오늘의 청계천은 출입 금지였다. 물이 불어난 건 아니었지만, 예방 차원의 조치인 모양이다.
청계천에서 발길을 돌려 명동성당 방면 보행자 섬에 올랐다. 이른 아침이라 통행량이 적어서인지 자동차들이 쌩쌩 달렸다. 횡단보도 군데군데 움푹 팬 부분마다 물웅덩이가 생겨있었다. 그 위로 비치는 햇살과 신호등 불빛이 묘한 운치를 만들었다. 사진 몇 장을 찍어봤으나, 어쩐지 심심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로버트 카파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의 사진이 충분히 좋지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다.” 한 걸음 더 다가가야겠군. 그렇게 결심하며 앞으로 내디딘 순간, ‘촤아아아악’ 쌩쌩 달리던 차가 횡단보도 앞의 웅덩이를 통과하며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차가운 물줄기가 내 몸 전체에 닿았고, 내 얼굴 아래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시원하게 홀딱 젖었다. 이렇게 흠뻑 젖은 게 도대체 얼마 만일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전혀 당황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났다. 이런 일이 생기다니, 오늘 하루가 왠지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예고 없는 설렘을 온몸으로 맞는 와중에, 초록 신호가 켜졌다. 나는 젖은 을 훌훌 털며 길을 건넜다. 오늘 하루의 모든 일에, 초록불이 켜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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