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길 지하철의 두 맹수

by 오제이


퇴근길 지하철은 늘 북적거린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은 저녁 6시. 조금이라도 늦게 나오는 날이면 꼼짝없이 사람들 틈에 껴서 가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다니는 회사가 유연근무를 시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침에 조금만 부지런하면 무려 5시 반에 퇴근할 수 있으니, 직장인으로서 꽤 큰 혜택이다.


어제는 오랜만에 5시 반 정시에 퇴근했다. 몇 주 동안 일이 몰리며 늦게 나가는 날이 많았는데, 겨우 평정을 되찾은 참이었다. 종로 거리에 비가 내려 공기가 한결 시원했다. 나는 우산 없이도 가뿐한 발걸음으로 지하철역까지 10분쯤 걸었다. 계단을 따라 한 층 내려가고, 좌우로 코너를 돌자 개찰구가 보였고, 그 위 전광판엔 마침 ‘연천행’ 열차가 진입 중이라는 알림이 떠 있었다. 순간 기쁜 나머지 목에서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이건 나만의 퇴근 루틴에서, 가장 반가운 순간 중 하나다. 1호선이 딱 맞춰 들어올 때 느끼는 이 작은 행운이란.



전동차가 들어오기 전, 나는 빠르게 5-1번 구역 탑승구 앞에 섰다. 한 차량마다 출입문이 네 개 있는데, 나는 주로 1번과 4번을 이용한다. 에어컨이 비교적 잘 나오는 쪽이다. 가운데 쪽은 종종 바람이 안 나오거나, 나와도 뜨뜻미지근한 경우가 많다. 사람이 많은 시간대엔 옆 칸으로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기에, 처음부터 잘 고르는 게 중요하다.


곧이어 열차가 도착했고,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왔다. 내리는 이들이 빠져나갈 틈을 기다려, 마치 암묵적인 합의라도 한 듯 모두가 동시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흐트러짐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기계장치처럼 정교했다. 나는 사람들이 줄지어 앉은 창가 쪽을 바라보며 서서 손잡이를 잡았다. 객실 안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 일어날지, 얼굴로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다. 다만 내 앞사람이 일찍 일어나주길 바랄 뿐이었다. 나의 이동 시간은 대략 40분. 그 시간 동안 나는 주로 전자책을 읽는다. 지하철은 버스보다 대화가 적은 편이라 귀를 막을 필요는 없지만, 잔잔한 백색소음을 듣는 쪽이 더 집중이 잘 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이어폰을 낀다.



15분쯤 지났을까. 앞사람이 살짝 몸을 틀었다. 보통 그렇게 움직이면 한두 정거장 내에는 일어난다. 의외로 빠르게 자리에 앉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설렜다. 어디쯤일까 싶어 전광판을 힐끔 봤다. 예상대로 아직 반도 지나지 않았다. 다시 앞을 봤더니, 그 사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옆 옆에 있던 청년이 재빠르게 고개부터 들이밀더니 그 자리에 먼저 앉았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자리 하나 때문에 조급해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속은 조금 상했다. 나도 모르게 그 청년을 바라봤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그 여성은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조금은 웃겼다.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미리 찜해둔 자리도 아니고, 먼저 앉은 사람이 주인인 게 지하철 룰이니까. 나는 그냥 다시 책을 펼쳤다. 그 후로 10정거장쯤 지났을까. 앞에 앉은 여성이 눈을 떴다. 이번엔 진짜 기회였다. 나는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슬그머니 손에 들었다.



그런데, 그녀뿐 아니라 그 옆 사람도 함께 일어났다. 나는 두 사람을 비켜주기 위해 잠시 뒤로 물러섰고, 그 순간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빠르게 자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렇게 또 자리는 바뀌었다. 서울 사람들이 깍쟁이라는 말을 그냥 듣기만 했는데, 이럴 때 진짜 실감하게 된다.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주변이 덜 붐벼서 편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집 가까운 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어릴 적엔 빈자리를 보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그냥 서 있는 것도 힘들었고, 앉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앉고 싶었다. 그때 나는 술도 마셨고, 체중도 지금보다 10킬로는 더 나갔다. 기초 체력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나는 지금 무척 건강하다. 운동도 꾸준히 하고 식단도 챙기다 보니, 전처럼 ‘힘이 없다’는 느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요즘은 자리가 눈에 들어와도 덤비지 않는다. 그저 있으면 앉고, 없으면 서서 간다. 어제도, 오늘도 앉지 못했지만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발이 아프다기보단, 머리가 둔해지고 졸음이 몰려올 뿐이다.


피로는 몸보다 정신에서 시작된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집중력과 정신력도 체력처럼 훈련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 방법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내일은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앉아서 퇴근길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독립출판사 오버플로우 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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