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피하지 않기로 결심하면

by 오제이


오늘 새벽, 출근길에 폭우가 쏟아졌다. 지난 몇 년을 통틀어 가장 사나웠던 아침이었다. 종로와 을지로 일대는 온통 물에 잠겼고, 청계천 수위는 가파르게 치솟았다. 수표교 위에서 청계천을 내려다볼 땐 산책로가 어렴풋이 보였는데, 회사에 도착해 빌딩 밖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그 길은 물에 잠겨 흔적조차 사라져 있었다.


차도와 인도엔 물웅덩이가 생겼다기보단, 도로 전체가 물바다가 되었다. 오히려 물웅덩이가 없는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여기저기 떠 있는 섬처럼 보이는 마른 땅을 몇 번 폴짝폴짝 건너보다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이미 바지와 신발이 다 젖은 뒤였다.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고, 우산을 깊이 눌러쓴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괜히 발을 헛디뎌 사고라도 날까 두려워졌다. 결국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하기로 했다.



편의점 안은 빗소리와 전혀 다른 세계처럼 고요했다. 진열장 주위를 한 바퀴, 두 바퀴 돌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빗발은 수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새로 나온 제품을 구경하고, 간이 식탁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죽였다. 밖은 여전히 폭우였다. 더는 의미 없는 기다림 같았다.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정면돌파하자. 편의점을 나설 땐 차마 빈손으로 나올 수 없어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하나씩 집었다. 그 와중에도 당류가 가장 적게 든 샌드위치를 골랐다. 그 와중에도 당류가 가장 적게 든 제품을 고르는 나 자신이 조금 웃겼다.


나는 다시 빗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마음속에 단단한 다짐이 하나 생겼다. 하반신은 어쩔 수 없더라도, 가방만은 반드시 지키겠다. 가방을 허리 위로 높이 메고, 우산은 가슴까지 바짝 끌어당겨 썼다. 빗물이 스며들 틈이 없도록 단단히 방어 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두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워커 안은 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더는 몸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젖을 몸이라면, 이제는 그저 안전하게 도착하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생각하니 비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워터파크에 온 것처럼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조금은 유쾌했다.



비가 조금만 올 땐 어떻게든 피하려 애쓰지만, 상식을 벗어나 퍼붓는 비 앞에서는 그런 애씀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비를 맞기로 결심하고 나니, 모든 것이 간단해졌다. 역경이란, 결국 마음이 정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다. 책에서 읽은 ‘더 큰 포부를 가지고 더 크게 생각하라’는 상투적인 말의 의미가 조금은 진심으로 와닿았다.


문제란, 내가 그것을 문제라 여길 때만 문제로 존재한다. 스트레스 역시 마찬가지다. 불편함을 느꼈다고 곧바로 스트레스로 연결해버리면, 이 세상은 화낼 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처럼, 비를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듯, 삶에 찾아오는 수많은 문제를 그저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조금 더 높은 관점에서 새로운 목표를 바라보게 된다면, 이 세상에 나를 진짜로 괴롭힐 수 있는 일은 별로 남지 않을 것이다.







독립출판사 오버플로우 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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