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만들었다던 중세 최고 인기의 약은 사실...
레바논 출신의 작가이자 공쿠르 상 수상에 빛나는 아민 말루프(1949년 2월 25일, Amin Maalouf, 아랍어: أمين معلوف)의 저서인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2002년, 아침이슬, ISBN13-9788988996249)’이라는 책을 읽다 보면 중세 서양의 의학 지식 및 의료의 수준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낮았는가에 대한 사례들을 엿볼 수 있다.
중세 서양의 의료행위의 근간은 바로 약물에 의한 치료, 즉 약물요법이었다. 당대의 의사들과 과학자들에게 있어 환자에게 적절한 약물을 결정하고 약을 지어 복용하게 하는 능력은, 여러 가지 약재들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자신의 기량과 권위를 뽐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재산목록으로 여겨졌다.
중세 시대의 약물들은 단일 약재로 처방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복수의 약재를 혼합하여 처방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대로부터 전래되어 온 민간 요법을 계승한 것도 있었지만, 현대의 윤리나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인체 실험’을 통하여 약물이 만들어진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오늘은 중세 시대에 환자들에게 자주 처방된 황당한 수준의 약물 중 가장 유명한 약인 ‘St. Paul’s Portion’을 소개해볼까 한다.
이 약은 사도 바울(혹은 성 바오로)가 발명했다고 알려져 당시에 널리 처방된 약물로, 주로 간질환자나 강경증(Catalepsy), 혹은 위통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주로 처방된 약으로 유명하다.
약물을 조제하는 방식이 중세 유럽 답게 특이한데, 감초, 버드나무, 장미꽃, 회향, 계피, 생강, 맨드레이크(Mandragora officinarum), 세이지에 후추와 가마우지의 혈액, 그리고 용혈수(Dracaena draco)의 뿌리를 갈아 넣고 끓여서 용액을 만든다.
무언가 황당한 조합이라고 생각되지만 약물을 조제하는데 들어간 각각의 재료들만 놓고보자면 의외로 여러 가지 질병 및 증세에 탁월한 효과를 볼 수도 있다.
감초는 일단 기침과 기관지염을 다스리는 약재로 동서고금을 통해 사용되었고, 세이지는 뇌혈관의 순환을 개선하고 기억력을 돕는 약재로 현대 의약학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버드나무에는 아스피린과 동일한 성분이 들어가 있고, 회향과 계피, 그리고 생강은 모두 장내에 찬 가스를 완화하여 복통을 줄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
가마우지 등 동물의 혈액은 빈혈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에게 철분을 공급하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고 맨드레이크는 독성이 강한 식물이지만 당시에는 수면제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용혈수의 뿌리는 항생제나 항 바이러스제 혹은 이질을 치료하는 약품으로 현재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약재이다. 현재는 주로 모로코나 카나리아 제도에서 채취한다.
이렇게만 보자면 정말 다양한 증상이나 질병들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본디 약재라는 것은 마구잡이로 섞다 보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법.
중세 시대에 가장 흔하게 처방된 약물 중에선 TOP 3 안에 들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사도 바울의 약'이지만 실제로 간질 환자나 강경증 환자에게 탁월한 효능을 발휘했을 지는 미지수다.
이 약을 복용한 환자는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그다지 효과는 없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고보니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둘카마라가 네모리노에게 팔았던 '묘약'도 사실은 값싸고 품질 나쁜 포도주에 불과하지 않았나.
다만, 중세의 이러한 약물 개발의 시도는 이후 식물학 분야로 발전되었으며, 오늘날의 서양 약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니, 중세 서양인들의 이러한 시도가 헛되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까, 새삼 현대에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된다.
뭐, 그렇다구. 후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