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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우 Mar 26. 2019

독립문, 과연 보존할 가치가 있는가?

독립문 공원에서 3.1절 기념행사를 해대는 건 어이가 없잖아. 솔까말. 

김영삼 정권 시절에 중앙정부청사(당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일재의 잔재를 청산한다면서 헐어버렸는데.. 이왕 헐어버릴 거였다면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독립문도 같이 헐어버리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요즘 든다. 아니, 예전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 요즘은 더 심해졌다. ㅋㅋ 


예전에 연희동 살던 시절 출퇴근에 이용했던 470버스가 독립문에서 경희궁을 지나 서대문 사거리에서 종로쪽으로 가는데, 을씨년스러운 독립문 공원을 볼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이다.  


난 개인적으로는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어버린 것에 그닥 찬성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놓고 두고두고 기억하는게 더 좋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독립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만약에 우리에게 치욕적이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싹다 밀어버리는"게 유일한 옵션이라면, 대한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 아닌, 청조에 칭신하던 것을 떠났다는 기념을 하기 위해 당시 일본 고관들의 막대한 후원으로 세워진 독립문 역시 보전해야 할 가치는 없는 흉물이 아니겠냐는게 내 생각인거다. 


특히, 서울시가 지금 그 바로 옆 동네에 경희궁을 복원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말이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사실상 물건너간 이야기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 근방의 개발 여파로 인해 무악재 인근의 상권과 주민들이 서울시와 마찰을 빚기도 했고. 


현재 독립문의 위치는 정확하게 독립문이 세워진 곳에 있지 않다. 원래는 지금 금화터널을 지나 사직터널로 이어지는 구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1979년에 터널을 뚫고 고가도로를 만들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거라능. 박정희 시절에 이루어진 마지막 문화재 훼손이기도 하다. 


자리를 옮기면서 독립문의 바로 앞에 있던 두 개의 기동 역시 함께 옮겼는데, 이 기둥은 청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행차할 때 통과의식을 치루던 영은문의 기동이다. 구한말에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기둥만을 남겨놓은 채 독립문을 그 앞에 세운 이유는 바로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재는 박정희 정권 말기에 독립문을 옮기면서 영은문 기둥의 뒤로 옮겨놓는 꼴이 되어버렸다. 여러가지로 삽질을 한 셈. 


영은문은 한자로 迎恩門이라고 쓰는데, 이것 자체가 사실 치욕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다. 풀이하자면 "은혜로운 이들을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 명나라와 청나라를 섬긴 조선은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하면 이 영은문까지 친히 나아가서 황제의 칙서를 받드는 일을 하였으니, 얼마나 치욕스러운 시설인지 알겠지?


이 곳에는 모화관(慕華館)이라는, 중국 사신들을 영접하는 시설이 있었고, 영은문은 그 정문이었다능. 모화관이 건립되면서 그 지역 이름 자체도 바뀌는데, 구한말까지 한성부 서부 반송방 모화현(漢城府 西部 盤松坊 慕華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을사늑약 체결 및 한일병탄 이후에 이 일대는 1914년 조선총독부의 경성부 행정지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경성부 현저정(京城府 峴底町)이 되었다. 참고로 峴底(언덕 밑이라는 뜻)라는 건 무악재 밑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이후 현저정, 서대문구역소 현저정으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 서대문구 현저정이 되었다가 1946년에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의 "정(町)"을 "동(洞)"으로 바꾸면서 현저동이 되었다. 현재는 그 일부가 무악동과 천연동에 속해있으며, 행정권한 역시 천연동 관할하에 있다. 


뭔가 스토리가 한참 삼천포로 빠졌는데, 여하튼 모화관, 역사가 상당히 길다. 처음 건립한게 무려 태종 7년(1407년)의 일이다. 원래 명칭은 모화루(慕華樓)였는데, 세종이 개수를 하여 규모가 커지면서 모화관이 되었다. 


단, 모화관의 정문은 한동안 그 명칭이 굴욕적이지 않았으나, 중종시대에 "명나라에서 사신이 올때는 항상 칙서와 조칙을 가지고 오며, 또한 천자가 친히 내리는 상사(賞賜)도 함께 가지고 오는데 좀 더 예의를 지켜 마땅하다"라고 하여 영은문으로 바뀌게 된다. 


영은문의 오리지널 현판은 임진/정유재란 때 불타서 없어지고, 선조가 죽기 2년 전인 1608년에 재건하는데, 그 현판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있다. 


그리고 모화관은 독립문 건립 전에 개화파 인사들이 몰려가서 현판을 뜯어내고 거기에 "독립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고, 1896년부터 독립문 건설을 시작해 1897년에 완공될 당시 영은문을 헐어버렸다. (참고로 독립관은 독립문 공원 뒤편에 현재도 보존되어있다)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는 이 독립문의 관리에 나름 철저했는데, 일부러 단까지 조성하는 등 꽤나 공을 들여서 관리를 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 독립문이라는 건축물 자체가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조선에 더욱 압박을 가하게 되고 일본에 협력하는 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건축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단, 독립문을 세울 수 있게 된 것도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서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하고 그 후원을 일본이 당분간 맡는다는 조건이 성립되면서부터이니까. 


그리고, 독립문 자체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과 태극문양이 새겨져있지만, 그 현판을 쓴 사람은 다름아닌 이완용이었다. 


독립문건립위원회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평생을 대한의 독립에 힘을 기울였던 서재필을 비롯, 을사늑약의 오적을 참수하라고 진언하다가 오히려 참수당한 박정양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기 멤버로 활동했던 김가진, 한일병탄 이후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3.1운동에 참가하면서 작위를 박탈당한 김윤식 등의 개념찬 인물들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이완용이나 윤치호 같은 친일파들도 독립문건립위원회(후에 독립협회)의 면면들이었다. 아. 젊은 시절의 이승만 또한 여기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재미지는 역사가 바로 이완용. 이완용은 당시에는 독립문건립협회의 초대 위원장이었고, 친미파의 주요인물 중에 하나였다. 처음에는 대원군과 민비를 등에 업고 출세를 하기 시작하여, 친청파에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순종의 "과외교사"도 하다가, 다시 친미파로 전향한 후 다시 친러파, 그리고 친일파로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면서 출세한 놈이다. 독립문의 현판은 한동안 김가진이 쓴 것으로 사학계에서 인식되어왔으나, 최근의 고증 및 검증을 통하여 이완용의 필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건물, 공원까지 조성해서 보전할 필요 있나? 하는게 내 솔직한 심정.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만약 독립문을 계속 보전해야한다면, 독립관의 내부를 리모델링해서 구한말 박물관으로 재조성하고, 독립문과 영은문의 기둥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는게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뭐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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