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에는 천사들이 산다.
[비상식적인 동유럽권 버스킹 여행]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과 멋진 건물,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들어도
만약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심성이 고약하다면
그래서 좋은 기억은커녕 나쁜 기억이 더 많이 남았다면
그곳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 지지 않는다.(feat. 터키 이스탄불)
내게는 천사 같았던
조지아 사람들과 있었던 따뜻한 기억 몇 가지를 풀어놓아보겠다.
1. 노트북 구매 취소했다가 일어난 일
조지아에 거주하던 중 노트북을 바꾸고 싶어서 스테이션 스퀘어에 갔었다. 이곳에는 대규모 단지의 마켓이 조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동대문 상가나 용산전자상가 등을 생각하면 되겠다. 즉 용산전자상가처럼 휴대폰, 노트북, 태블릿 등을 파는 곳이 있다.
내가 들고 다니는 노트북은 소니 바이오인데, 워낙 오래된 모델이라서 넥스트북으로 바꾸려고 스테이션 스퀘어에 갔다. 운 좋게도 넥스트북 구형 모델을 발견했다. 그런데 OS가 러시아어-_-; 영어로 바꿔달라고 하자 1시간 걸린다고 해서 기다렸다. 이후 결재 전 최종 체크를 하다가, 키보드 자판에 약간 이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1분가량 타이핑을 하다 보면 어느새 엉뚱한 곳에 문자가 쳐지는 현상이다. 고질적인 문제고(‘뽑기’를 잘못하면 일부 모델에서 이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혹시나 이 문제가 없을까 해서 테스트해봤는데 역시나.
“나는 이거 못 산다”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도 넘게 이곳에 있으면서 커피와 빵도 얻어먹고 수다도 떨고 OS를 영어로 바꿔달라고까지 했는데 차마 못 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때마침 나에게 커피를 타 주고 이야기도 했던 담당 직원이 잠깐 바깥에 나간 틈을 타, 다른 직원들에게 "못 산다"라고 고하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살 수 없다고 했을 때 실망한 얼굴을 보기가 미안해서였다.
그런데 내가 문을 열고 나오자 담당 직원이 바로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어디 가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어쩔 수 없이 곧이곧대로 이야기를 했다.
“이 노트북을 정말 사고 싶었는데 타이핑에 문제가 있어서 살 수가 없다”라고.
내가 매장 직원이라면 짜증 날 듯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금발에 파란 눈에 20대 초반 정도 되는 그녀는 오히려 내 표정을 보더니 ‘이리 와’해서는 날 부드럽게 꼬~옥 안아주는 게 아닌가. 어안이 벙벙했다. 포옹을 풀고 나자 그녀는 “어떡해. 너에게 노트북이 필요할 텐데 저 노트북에 문제가 있다니 안됐네. 미안해. 네가 원하는 노트북을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힘내!”라고 하는 게 아닌가.
헉..진상 고객에게 오히려 용기를 주다니!!!! 미안해도 내가 미안해야 되는 상황인데 이거슨 무엇?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상황들은, 다른 나라나 특히 한국 내에서는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다.
2. 이유 없이 나를 도와주던 지역주민들
조지아에서 호스텔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지친 나머지(?) 집을 얻었는데, 처음 집을 얻었을 때가 으레 그렇듯 해당 집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모르겠어서 헤맬 때가 많았다. 열쇠가 안 잠겨서 고생하고 있으니까 옆집 주민이 ‘짠’하고 나타나 도와주기도 하고, 빨래를 널어야 하는데 키가 안 닿아서 낑낑대고 있으면 어김없이 랜덤 조지안이 나타나 도와줬다. 심지어는 청소도구가 없어서 집 앞 쓰레기를 처리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누군가가 내 집 앞을 청소를 해주는 게 아닌가? 누가 그러나 싶어 고마운 나머지 새벽에 청소하는 소리가 날 때 몰래 지켜봤더니, 옆집 할머니였다. 한 달 넘게 내 집 앞까지 청소를 해준 고마운 분...(구조상 우리 집은 약간 지면과 떨어져 있었기에 청소를 하려면 우리 집 근처까지 와서 쓸어야 해서 꽤나 품이 든다.)
조지아의 전통은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고, 이 사람들은 남을 도와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오죽하면 조지아에 거주하던 외국인들 사이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문제없다. 조지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다 해결된다’라는 말이 돌 정도.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는 데다가, 아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든다. 이건 외국인에게뿐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그렇다.
3. 파리 사건
렌트했던 집에 파리가 들어왔다. 한 마리가 들어와서 무슨 일인지 따뜻한 우리 집에서 번식을 해서 30마리~40마리 정도로 순식간에 불어났다. 나는 집주인에게 클레임을 걸었다. 파리가 너무 많아서 못살겠다고. 그리고 전투를 예상했다. 보통의 집주인이라면 네가 더러워서 파리가 생긴 거 아니냐, 알아서 해결을 해라, 모르겠으니까 계약서대로 해라라고 했을 거다. 나는 집주인을 만나자마자 나름대로 전투태세를 갖춰 공격(?)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역시 조지아인이었다.
“그렇게 걱정하고 화내지 마, 그렇게 감정적으로 너무 동요되어 있으면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잖아.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게 해 주겠어?”
본인 집에 파리가 생겼으니 속상할 만한 상황인데도, 나를 비난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오히려 부드럽고 달래는 태도로 ‘도와주고 싶다’라고 말을 하니 그 누가 화가 안 풀리겠는가. 파리가 날아다녀서 힘들다고 호소하면서 약간은 화를 냈던 나는 그 순간 화가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후 집주인과 나는 함께 파리를 없애기로 합의를 봤고 이사 문제도 원만하게 해결을 봤다.
4. 비용을 안 내고 사라진 진상 고객을 이해해준 카즈베기 호스텔 직원
이것은 순전히 내 잘못이다. 카즈베기 호스텔에 묵자마자 환대해주고 바비큐를 구워주고 음식을 대접해주고 술을 권해줬던(우리나라처럼 인당 3만 원 추가금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기분에, 사람들이 많아서, 모두 공짜로...) 호스텔 사람들. 그러나 나는 호스텔이 너무 추워서 잠을 제대로 못 이뤘고, 새벽에 버스를 타고 트빌리시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트빌리시로 돌아가던 도중 깨달았다. 어젯밤 숙소 비용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_-;;;
몇 주 후에 다시 카즈베기를 방문해서 이들을 만나 안 낸 호스텔 비용을 냈다. 그런데 이들의 대답이 이랬다.
“우리는 계산을 하다가 네가 비용을 안 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 하지만 너에게도 어떤 상황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해하기로 했지. 그런데 이렇게 찾아와서 반성을 하고 비용을 내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 생각해주고 돌아와 줘서 고마워!”(여기에도 여지없이 빠지지 않는 포옹...)
5. 호스텔에 있던 조지아 사람들에게 음식을 받았다
트빌리시의 호스텔에서 일어난 일이다. 때는 새벽 2시였고 나는 급격하게 배가 고파졌다. 그전에 와인 마시고 맥주 마셔서 식사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생각을 못했는데 술이 깨니까 배가 너무 고프다. 그러나 한국과는 달리 새벽에 문 연 곳이 별로 없는 이곳. 어떡할까 하다가 같은 주방에 있는 조지아 사람들에게 말을 붙여봤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주섬주섬 음식을 꺼내는 게 아닌가? “나한테 생선 있는데 먹을래?”, “이 빵이라도 괜찮다면.”
그들이 모아 온 음식의 총량이 너무 많았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조지아 전통 빵 두 조각, 복숭아 한 무더기, 수박 한 덩이, 생선, 생선통조림, 토마토소스, 오이, 양배추 등등.
6. 나를 위해 특별히 방침을 바꾼 카페
트빌리시에 내가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다. 이름은 키위 카페. 비건들을 위한 카페로, 우유에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이곳을 자주 애용했다. 특히 두유를 넣은 커피를 자주 주문했는데, 한국과는 달리 그 양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큰 컵에 만들어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알겠다면서 만들어줬다. 심지어는 테이크아웃 잔이 너무 작다면서 다음 날부터 큰 테이크아웃 잔을 주문해서 가져왔고, 두유를 약간만 더 넣으면 된다면서 비용도 1라리만 추가했다. “카페 규정상 안 된다”라는 말을 더 많이 들어왔던 나에게는 참 감사한 일이었다.
조지아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매우 유연하다는 점이다. 규정이나 규칙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우리나라 대비 두유값이 높은 조지아 사정에 비춰 볼 때, 1라리만 추가하는 건 손해다-_-)
7. 길 가다 넘어졌을 때
하루는 길가다가 멋지게 슬라이딩을 하며 넘어진 적이 있는데 한두 명도 아니고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걱정하면서 나에게 다가와 도움을 줬다. 음료수를 주지 않나, 여기 앉아서 쉬라고 하지 않나, 뼈는 다치지 않았나 체크를 하지 않나...
그런데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대로변을 걸을 때 이런 상황을 몇 번이고 마주치게 된다. 한 남자가 계단에 다소 불쌍한 포즈로 앉아 있고 스무 명은 넘는 사람들이 그를 걱정하고 챙기는 장면을 본 적도 있다. 그의 상처 역시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8. ‘크레이지 조지안’을 외쳤을 때의 대답은
그날 나는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었다. 술도 마시고 내 주변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고민을 하느라 오만 상을 찌푸리고 대로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죄 없는 조지아 아저씨 두 명이 벤치 근처의 ATM에서 돈을 뽑으면서 나를 흘낏 바라봤다. 그것을 계기로 나는 진상을 부렸다. (그간 거리를 다니면서 ‘니하오’를 많이 들어 쌓인 것도 있었다 하하;;;)물론 영어로. “나를 왜 쳐다보는데! 크레이지 조지안! 조지아가 너무 싫어!”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술이 확 깨는 게 느껴졌다. 큰일 났다 싶기도 하고, 보통 이런 식으로 술 취해서 시비를 걸면 싸움의 시작이다. 이건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도 물론 그렇고. 어쨌건 전적으로 시비를 먼저 건 것은 내 잘못이다.
그런데 이 놀라운 두 명의 조지아 아저씨들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나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내 손에 키스를 해주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하는 말..
“너는 왜 화가 났어? 누가 괴롭혔어?”
“부디 조지아를 미워하지 말아 줘.”
짧은 영어지만 내가 표현한 분노를 복붙해서 나보다 더 화내기보다는 오히려 달래려고 한 그들. 술도 깼고 내가 한 행동에 반성도 돼서 울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들은 내가 사과를 하기도 전에 오히려 나를 달래고(?) 몇 번 더 포옹을 해주더니 자기 갈 길로 휭 가버렸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유 없이 분노를 터뜨린다면 분명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앞설 텐데... 당신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이것은 제가 그날 운이 좋아서 대인배들을 만나서 겪을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으니 따라 하지 맙시다 어쨌건 곧바로 술도 깨고 부끄럽고 반성도 되고 한참 그 자리에 앉아서 멍을 때렸다.
누군가가 화를 낸다. 그 기저에 있는 감정에 대해서 이전에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올바르게 따지지 않고 화난 감정만 밀어붙인 너의 잘못"이라고만 생각했고,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분노는, 특히 관계에 있어서는 부당하게 대우받은 슬픔과 외로움 같은 것이 바닥에 흐르고 있고, 분노는 그에 따른 반응일 뿐인 게 아닐까. 누군가가 나에게 화를 낸다면, 혹시 내 행동 때문에 슬프고 서운하고 외로웠는데 그걸 제대로 표현 못하고 화로만 분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아는 조지안이다. 세계 곳곳을 다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들러보고 살아본 나라들 중에서는 가장 친절한 영혼이 사는 곳. 법이 엄하고 경찰이 많아서 길거리가 안심되는 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순함과 따뜻함 때문에 마음이 놓이는 곳. 지금은 그곳에서 아주 먼, 동방의 끝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스산할 때는 조지아 사람들이 생각난다. 풍경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포근한 마음씨와 그들의 따스하고 끝없는 포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