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소시오패스(?) 작가 영국인 레이 1/2

아직도 그의 정체를 모르겠다

by 위키별출신

[비상식적인 동유럽권 버스킹 여행]



이렇게 스웨다와 데이비드와 레옹과 어울려 매일 맛난 저녁도 얻어먹으며 평안하게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비건 레스토랑에서 레이라는 영국인을 만나면서 잠시 내 여행은 꼬이게 된다. 지금도 좀 후회한다. 왜 내가 그를 따라가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을까!


사기꾼들이 그렇듯 레이의 첫인상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피해자만은 나 만이 아니니, 나의 어리석음을 심하게 탓하지 않으려고 한다.


레이와 만나게 된 것은 유제품 알레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유제품 알레르기가 있어서 우유나 치즈, 요구르트, 버터를 먹으면 배가 아프거나 설사를 하고 두통이 생기고 때에 따라서는 며칠간 잠만 자고 못 일어나기도 하는 등 살기가 참 힘든 몸이다. 특히나 치즈로 가득 찬 조지아에서 살아남기란ㅜㅜ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지? 살아 돌아온 것만도 용하게 느껴진다.

한국 우유나 치즈, 요구르트, 버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살균을 잘해서 그런가, 그도 아니면 그래도 몇십 년을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가. 배가 살살 아프고 며칠간 두통으로 앓아눕거나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고생하는 정도. 그러나 러시아, 노르웨이, 체코, 조지아로 오면서 문제가 달라졌다. 너무나 심한 거부반응이 있는 것. 우유 조금 먹었다가 이틀 동안 설사와 두통으로 시간을 낭비하는가 하면, 하차푸리(조지아의 전통요리. 치즈를 채운 빵으로 국민 음식인 만큼 매우 흔하다.) 조금 얻어먹었다가 끊임없는 기침으로 일주일 내내 기관지가 고통받는 등...





그래서 그날도 ‘이 음식에 유제품이 들어가느냐’를 물으며 식당 직원들을 귀찮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똑같은 질문을 레이가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레이는 영국 출신으로 조지아에 온 지는 6개월째다. 자신을 작가이자 요리사, IT전문가로 소개했다. 비슷한 알레르기가 있는 데다 워낙 남을 즐겁게 하는데 도가 튼 그의 밝은 캐릭터가 맘에 들었다. 게다가 같은 직업이라니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있는 호스텔이 좋다면서 여러 번 나를 설득해, 나는 별로면 곧바로 돌아오리라 마음먹고 그를 따라나섰다.


그가 머무는 호스텔은 아늑하고 6명 정도만 잘 수 있으며 넓은 거실이 있었고 부엌과 거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공간이 더 넓어 보였다. 더군다나 사람이 별로 없는 게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호감이 갔다. 스웨다와 데이비드의 연애사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단점이 있었는데 아무데서나 담배를 뿜 뿜 피워댄다는 것이었다. 여행지에 와서 한 곳에만 머무는 것도 경험의 총량이 작아지는 것 같아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레이는 내가 그가 머무는 호스텔로 오자 무척 기뻐하면서 치킨 볶음밥과 스파게티를 만들어줬고 우리는 거의 절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찾아가고 싶어 했던 장소를 그도 보고 싶어 해서 함께 움직였고, 호스텔 손님과 더불어 네다섯 명이 우르르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친해지고 보니 레이는 말에 책임을 못 지는 남자였다. 사실 이는 첫날부터 감지가 됐었는데, 내가 호스텔에 묵기로 하자 ‘혼자 지내기 외로웠는데 와 줘서 고마워. 감사의 표시로 너의 오늘 숙박비는 내가 낼께!’라고 이야기했고,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끝끝내 내겠다고 우겼다. 그래 놓고는 다음날 나에게 손을 내밀면서 숙박비를 달라고 했다. 어제 그가 한 말을 연상시켜줬지만 그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라며 시치미를 뗐다.


‘치과에 가야겠는데 혼자 못 가니 같이 가달라’고 해서 갔더니, ‘나는 가격만 알아보러 왔고 이 사람은 진료를 받으러 왔다’라며 나를 진료실로 들여보내 억지로 진찰을 받게 했다. 아까운 5만 원가량의 진료비를 내고 ‘너는 왜 안 받냐, 애초에 네가 진료받고 싶다고 해서 온 건데’라고 해도 그런 적 없다고 잡아떼기. 작가라고 하더니만 다른 호스텔 손님과 이야기할 때 보니까 나에게 했던 말의 80%는 그저 ‘뻥’ 임을 알게 되어 더헉하기도 하고, 예쁜 여자 여행객에게는 ‘나는 결혼한 적이 없다’, ‘영국에 큰 집이 내 소유로 있고 여기는 잠깐 놀러 왔다’라고 거짓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혼해서 애가 둘이나 있고, 이혼당할 때 집은 뺏겼다.) 어떤 프랑스 남자가 '자신은 음악을 너무 좋아한다'고 하자 자신의 음악적 지식을 펼쳐보이며 자신을 '프로 음악가'라고 소개했는데, 대부분이 내가 그에게 알려준 내용이었다. 즉 정보의 재활용. IT전문가라더니,일반적인 한국사람이 이름이라도 대충 아는 자바스크립트 관련 내용을 물어봤더니 갑자기 자기는 네트워크를 전문으로 한다면서 입을 닫기도 했다.


그의 거짓말이 보이기 시작하니 그가 이곳에서 뭘 하는지도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여자, 혹은 친절해 보이는 남자 여행객을 타깃으로 잡았다. 타깃이라고 해봤자 정말 사기를 치거나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는 건 아닌데, 내가 볼 때는 한없이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이었다.


온갖 거짓말과 허세로 자기를 포장하고 상대방 여행자와 하루 이틀 정도의 친분을 쌓은 다음에 아마존에 있는 본인의 E-book을 강매했는데, 가격은 만 삼천 원(13불)정도였고 페이지 수도 고작 150페이지 남짓에, 남의 저작권 따위는 아랑곳없이 베스트셀러에서 대충 내용을 복붙한 자기 계발서였다. 표지도 본인이 대충 그린 것인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즐겁게 해 주고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인 남자의 책을 안 사주고 넘어가기 어려운 순진하고 친절한 유럽인들은 그 책을 사줬다. 그런 쓰레기 같은 책을 아마존에 올려놓고는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하다니, 나는 옆에서 얼굴을 찌푸렸다.


호스텔 비도 조금씩 훔쳐가는 것 같았다. 그는 처음에는 ‘조지아에 온 지 6개월째’라고 말했는데 내가 볼 때는 정말 6개월 인지도 의문이었다. 오랫동안 호스텔에 장기 투숙하는 그에게 호스텔 주인은 리셉션 같은 업무를 맡겼다. 즉, 레이는 무료로 숙박하는 대신 다른 손님들의 호스텔 비를 받아뒀다가 다음 날 주인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그가 일찍 체크아웃한 손님 호스텔 비는 세지 않고 주인에게 넘겨주는 것을, 그들의 대화를 듣다 알아차리고 경악했다.


여행자들에게서 교묘하게 물품을 뜯어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곳에 처음 당도한 여행자들은 마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는 자기가 잘 안다면서 그들을 끌고 가고, 그들은 친절하게도 마트까지 데려다준 레이를 그냥 보내기엔 미안해진다. 레이가 원하는 물품이 있으면 자기 걸 살 때 함께 샀다. 그는 ‘아니, 네가 이렇게 친절할 줄이야!’라면서 기대하지 못했던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는 새로운 사냥감이 올 때마다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레이 몫까지 사주는 친절한 사람이 아닐 때는 말로 구슬렸다.

“내가 요리사라서 xxx, xxx도 만들어 줄 수 있어. 너 xxx 해 먹고 싶지 않아? 내가 정말 기가 막히게 잘해.”

치킨 볶음밥에 필요한 치킨이 10만큼이라면 그는 50만큼을 사게 만든다. 물론 그다음에는 저녁에 꽤 괜찮은 요리를 해 주기는 한다. 그중에서 8 정도밖에 안 써서 문제지. 다음날이 되면 전날 레이와 함께 와인도 마시고 여행담도 실컷 교환한 낙천적인 여행자는, 레이에게는 아주 고맙게도 냉장고 안의 치킨은 잊고 가버린다. 그것은 레이의 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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