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정체 좀 알려주세요
[비상식적인 동유럽권 버스킹 여행]
물론 매우 안 좋은 행동들이지만, 여기까지는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저렇게 진화했구나.’라고 생각해줄 수도 있다. 물론 스웨다가 운영하는 호스텔의 사업 망한 아저씨들은 저런 행동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돈은 없어도 서로 돕고 살았고,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등쳐먹지는 않고 오히려 없는 형편에 음식까지 서로서로 나눴다. 비슷한 수준의 나락에 빠져도 나타나는 사람의 모양새는 다른 거구나, 이런 게 그릇이구나 하는 묘한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거짓말은 날로 진화하여 나중에는 나에게 민폐까지 끼치는 정도에 이르렀다. 본인이 요리를 하다가 솥을 태워먹고는 ‘저 아시안 애가 그랬어요’라고 주인에게 이르는 바람에 나만 면목이 없어졌던 적이 있고,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곤란해졌을 때는 일어나지도 않았던 나의 복통을 핑계로 삼기도 했다. 또한 내가 잠깐 2-3일짜리 여행을 다녀오면 내가 사뒀던 음식이나 물건은 어김없이 사라져 있었다. "네 물건도 아닌데 왜 함부로 손대냐. 나 금방 돌아올 예정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사용하려면 주인에게 언급이라도 해야지."라고 따지면, "넌 분명 일주일 뒤에 돌아온다고 했어. 상하기 전에 요리한 게 뭐가 잘못이지?" 라면서 오히려 날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이 정도가 되자 나는 그의 훌륭한 영국식 영어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신조차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거짓말이 장착되어 있고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는 데 능수능란한 그는, 테스트를 해 보지 않아도 소시오패스였다. 자신을 고까운 눈으로 보며 이용당해주지도 않는 내가 좋게 보일 리 없다. 그가 어떤 속셈으로 나를 이 호스텔로 끌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를 관찰만 할 뿐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나에게 그는 점점 못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놓고 삿대질을 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으나, 웃는 얼굴로 나를 곤란하게 하는 말을 다른 여행자들 앞에서 하는 식이었다.
그를 떠날 것을 결심한 것은 어느 날 아침이었다. 전날에 독일과 프랑스에서 온 두 명의 유쾌한 여행자들과 신나게 어우러져 논 뒤, 함께 특정지역으로 하루짜리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물론 그 자리에는 레이도 끼어있었기 때문에 그를 포함한 넷이서 여행을 가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탐탁지는 않았지만 그를 놔두고 갈 방법도 없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나 빼고 세 명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레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이미 셋이서 여행을 갔다는 게 아닌가? 황당했다. 도대체 왜 나를 놔두고 갔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레이는 ‘나 네가 너무 걱정돼. 너 아직 목 안 매달았어?’라는 험악한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장난을 빙자한 공격이었다. 혼자 있어 우울해하며 목매달아 죽지 말라는 걱정을 하는 것 같은 말이지만, 사실은 혼자 호스텔에 남겨진 걸 약 올리려고 그 같은 말을 하는 듯했다. 유치한지고.

세 명이 돌아온 뒤, 나는 그날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독일 여자애는 “너 깨워서 같이 가려고 했는데, 레이가 ‘네가 새벽에 일어나서 배가 아프다고 너만 놔두고 여행 가라’고 말했다면서 우리만 끌고 왔어”라고 말했다. 그럼 그렇지. 여행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물었다. 독일 여자애는 자신을 불만에 찬 사람으로 표현하기 싫었기 때문인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레이는 사람들을 이용해먹었음이 드러났다. 본인은 지갑을 ‘깜박’ 놓고 왔다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두 사람에게만 쓰게 했으며, '호스텔에 돌아가자마자 안 낸 돈을 정확하게 정산할게. (그리고 엄청 비싼 거 시켰다고 함)'라고 낮에 했던 본인의 말을 그대로 이행하라는 독일녀의 말에 '내가 언제? 멋진 저녁식사로 벌충을 하겠다는 뜻이었는데 네가 잘못 들었겠지!'라며 주방으로 사라졌단다. 이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주방으로 사라진 덕이었다. 물론 그가 요리할 재료는 안 봐도 뻔했다. 그전 여행자에게서 ‘뜯어낸’ 소고기겠지.
내가 그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모두 가짜였음이 명명백백해지는 순간이었다. 레이는 원만성이 높아 보였으며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었기에 나는 처음에는 큰 호감을 가졌었다. 밝고 즐겁게,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건 착한 영혼의 표현형이라고 여겼기에. 그러나 정반대였다.
내가 그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일들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와 친해지던 초창기의 일들이다.
폴란드 청년: (무례하게) 너 지금 입은 옷이 너무 없어 보여.
레이 : (웃으면서) 아 그래? 혹시 어떤 색깔의 옷이 나랑 매치가 될지 네가 한 번 골라봐 주겠어?
호스텔 옆집 : (화를 내며)이 호스텔 앞쪽은 왜 이렇게 지저분해?
레이 : (웃으면서) 맞아, 너희 집은 무척 깨끗하네!
길거리 : 욕... 욕... 또 욕...
레이 : (웃으면서) 맞아요. 저 거지 같은 놈 맞고요, 정말 고마워요!
기분 나쁜 일에 화내지 않고 긍정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 나는 ‘넌 정말 대단하다’라고 칭찬을 했다. 그는 말했다.
“난 기분이 나쁠 때는 ‘기분 나쁜 감정은 오래가지 않고, 이 사람과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을 지에 집중하자’라고 생각하지. 인간관계나 일시적인 감정보다는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 이 말은 그의 행동을 파악한 이후에 돌아보니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진실하지 못했다. 하는 말의 80%가 거짓말이고 남들을 이용해먹기만 하는 소시오패스에게,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일반인은 귀여운 먹잇감에 불과하다. 어차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람에게 진실하지 않은데 왜 화가 나겠는가? 인간관계의 중요성 따위는 모르고,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니 화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화내지 않는 이유는, ‘아이디어’를 교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사람을 어떻게 착취할까? 다 나에게 놀아다나니 웃기고 재미있네’ 같은 걸 생각하거나, ‘어떤 거짓말을 해야 잘 먹힐까?’를 궁리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낙천적인 웃음은 까놓고 보니 교활함과 비열함이었다.
처음과 끝이 이렇게 달라진 것에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나는 짐을 쌌다. 그가 범죄를 일삼는 수준의 소시오패스는 아니라서 나에게 큰 해악을 끼치지는 않은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레이는 이후로도 내 왓츠앱에 ‘저는 지금 XXXX(유명한 관광지)에서 엄청난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라면서 간간히 약올림성 문자와 사진을 보내왔다. 지금도 왜 보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낚시질의 일종이었겠지 싶다. 그의 실체를 알고 난 이후에는 그가 자랑하는 그 무엇도 궁금하지도 부럽지도 않았다. 충분할 만큼의 시간을 두고 그를 관찰한 덕에, 그와 비슷한 사람을 피해 갈 수 있는 경험량이 쌓인 것에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