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2년 여행할 짐, 25시간만에 싸기
이 정도로 대책이 없는 줄은 몰랐지?!
두려움과 회피본능, 폭풍 짐싸기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계획한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 혁명>이라는 책이 있다. 나의 성격은 무엇인지, 뭘 고쳐야 이 생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을지, 뭐가 문제길래 나의 삶은 이모냥인지 알아보기 위해 책을 골랐다. 이 책에서는 '스트랭스 파인더'라는 테스트를 통해 개인이 가진 장점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단점보다는 장점에 주목하라는 현명한 가이드를 제시해준다. 쓰고보니 웬 아마존 리뷰같은걸? 아무튼, 이 책에 나온 방식대로 해 보니 나의 강점 중 하나는 '행동주의'였다. 생각하기보다는 행동하고 계획하기보다는 무계획한, 대책이 없는 인간이라는 소리였다. 이 테스트 결과를 읽으면서 나는 과거의 나를 품어줄 수 있었다.
과거의 나는 어땠는고 하니..일반적인 여행 루트로는 다녀 본 역사가 없다. 가장 처음 갔던 여행다운 여행은,
17살에 혼자 떠났던 통영이었는데 그냥 터미널 가서 무작정 버스표를 끊고 도착해보니 새벽 3시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계획에 무대책이다. 그러나 버스터미널에서 멍때리고 있으니 어떤 여자분이 도와주셔서 근처 시장도 구경하고, 시간을 때우다가 통영 시내로 갔더니 웬 궁도장 노부부가 나를 픽업해주어서 여행지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고 여행자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첫 해외여행지였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칫솔세트와 여권만 가지고 갔다. 호텔패키지라서 공항에서 담당자가 나를 픽업해서 호텔에 떨궈주고 마지막날에 다시 픽업해서 공항에 떨궈주는 4박 5일 코스였는데, 담당자는 나를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 "가방 가지고 오셨나요?"했는데 내 대답이 "아니오"였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정책을 좀 바꿨지만 그래도 가방의 무게는 변함없기 가벼웠다. 옷가지 몇 개만 들고 떠났던 베트남, 필리핀, 대만 등. 게다가 제대로 계획을 세워본 적은 없고 항상 대책없이 가서 우연히 만난 현지인과 노닥거리다가 오곤 했다. 이 정도의 서술이면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대책없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번 만큼은 아무 짐도 없이 떠날 수가 없었다. 장기여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여행이라고 해서 남들처럼 비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몇백 개의 나라를 무비자 통관 가능! 이라는 문구 하나만 믿었다. 또한 이런 생각도 들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년을 계획하고 갔지만 가자마자 돌아오는 경우도 많고, 더군다나 해외가 아닌가? 구글링으로 찾을 수 있는 정보에도 한계가 있다.'
내가 가고자 했던 나라는 조지아였다. 찾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되어 있었다. 뭐, 대충 이 정도였다.
-조지아는 와인의 나라
-서양과 동양의 중간쯤에 위치해서 음식이 맛있을 가능성이 높다(?)
-수도 트빌리시에는 “Tblisi Loves You"라는 공용 와이파이가 뜬다
-카즈베기가 예쁘다(당시 조지아에 대해서 TV에 나오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이상하게 내가 가자마자 TV에서 집중? 방영을 하더라는...오지의 마법사인가..)
-무비자로 머물 수 있는 기간, 365일(한 마디로 영원히?)
이 나라의 가장 큰 메리트는 비자였다. 딴 까탈스러운 유럽나라들처럼
“머물려면 학생 비자를 사세요. 가격은 10,000달러입니다.”
“생활비는 자체 해결 아시죠?”
뭐 이런 정책들과
“관광하러 왔어? 3개월 됐으니까 빨리 돌아가! 오래 머물지마!”
뭐 이런 정책만이...
중요한 것은 나는 가난해서 학생 비자같은 걸 살 형편은 못된다는(갑자기 눈물이 흐르려고 하네)는 점...
그래서 조지아의 외국인 환대 정책이 맘에 들었다. 무비자로 눌러앉으리라는 아무 계획 없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이 컸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라 아닌가. 혹시 인종차별이 있으면 어떡하지? 동양에서 왔다고 안 놀아주면 어떡하지? 가서 영어공부도 하고 조지아 여행도 하고 하려고 했지만 계획대로 안되서 바로 돌아오게 되면 어떡하지?
이어지는 폭풍고민...
갈까 말까 왜 가야 하나 to be not to be의 시간을 거쳤으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이미 마음을 굳게 먹자마자 항공편을 지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짜도 며칠 뒤였다. 그리고 취소할까 말까를 고민하다보니 짐을 쌀 수 있는 시간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뺄 것인가...?!
그래서 내가 가져간 물품
1. 디지털 피아노 야마하 NP-11
돈은 없으니(?!?!?!) 가서 버스킹을 해서 그걸로 여행을 하자. 유럽등지는 버스킹 팁이 후하다더라. 그런데 뭘 가져가지? 내가 가진 피아노는 하나가 아니었다. 61건반 두 개에 76건반 두 개, 88건반 두 개(하하하...)
욕심같아서는 76을 가져가고 싶었지만
1) 무거울까봐
2) 잃어버릴까봐
가장 저렴이하고 가벼운 61건반을 가져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가볍다는 것뿐, 상당히 무겁다.
NP-11의 사양은
100x25cm...4.5kg...(페달 등을 합치면 6kg은 된다...)
(요렇게 생김.... 수화물에 넣을 때도 골치입니다.ㅠㅠ)
2. 옷이 가득찬 캐리어 1
여행은 짐이 가벼울 수록 즐겁다! 아무것도 안 가져가는 게 좋다! 옷도 신발도 그 무엇도 가져가지 말자!
가 내 그간의 여행철학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한 번 찍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한 달 정도 러시아를 여행했는데, 추워죽는줄 알았다. 대책없이 살아왔기에 그때도 옷이 없어서, 현지인 아자씨의 도움을 빌어 모스크바의 허름한 옷가게를 찾아갔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옷을 집었더니 46만원인 게 아닌가? 한국에서 만 원 이 만원에 살 수 있을 품질의 옷은 십만 원을 넘어갔다. (옷은 아시아가 쌉니다.)
쇼핑 과정도 문제다. 조지아가 예전에 소비에트 연방 국가라 분명 러시아어를 쓸 것인데 나는 러시아어를 하나도 못한다.-_-;; 그 와중에 과연 옷파는 상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찾아낸다면, 그 가격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겨울 자켓을 있는 대로 챙겼다. 실제로 이는 잘한 선택이었다. 조지아는... 공장이 엄서서... 모든 옷과 신발과 기타등등 공산품을 수입하기에..물건이 비싸다. 게다가 디자인마저 구려서 살 생각이 안 든다..-_-;;(조지아뿐 아니라 동유럽은 개방한지 얼마 안 되서 그런가, 물건이 비싸면서 품질이 구리고 서비스정신도 없는 삼박자의 향연이었다.)
3. 전자제품이 가득한 캐리어 2
랩탑 둘과 충전배터리와 mp3와 기타등등등
짐을 싼 것까지는 좋았으나 캐리어 둘과 디지털피아노 하나를 든 나는 이후로 행동의 제약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는 건 나중에 깨닫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