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파푸너랑 얘기했어.”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로빈이 이 말을 했다.
오래 호스텔에 머무를 순 없었다. 머무르기 싫었다. 정확히는 니노와 얼굴을 마주치기 싫었다. 나는 굉장히 오랫동안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은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도 모리스는 늦게 집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나를 위해서 현관을 잠그지 않고 놔두었다. 새벽 다섯 시 정도 되었던 시각, 나는 새벽 네시 조금 넘어서 니노의 호스텔은, 정확히는 마리아의 곁을 떠나서 모리스의 집으로 향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날 니노는 그 시각이 되도록 호스텔로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만든 음식이 식탁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은 지 한 시간은 되어보였다. 아마 술 먹고나서 배고플 수 있으니까 음식을 만들어 둔 것 같았는데, 여기 두 사람이 있으니 어느 쪽이 범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의 예상이 맞았다. 마리아와 맥주를 좀 마시다가 왔으니까. 전자렌지에 이 분 정도 돌려서 따뜻해진 그릇을 꺼내면서 반대편의 닫힌 방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당연하게도 오후 늦게 일어났다. 그건 나만이 아니고 이 집에 있는 모두에게 해당되었다. 공연 다음 날은 원래 사람들이 퍼지게 마련이고, 나만 술을 푼 건 아니었다. 내가 제일 먼저 깼다. 가장 늦게 모리스의 집에 도착한 내가 가장 일찍 일어났다는 게 신기했다. 시간은 오후 네 시. 완벽하게 낮밤이 바뀌었다. 하지만 실컷 잔 만큼 몸은 상쾌했다.
나는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는 베란다로 나갔다. 아래 층에 있던 조지안 할아버지가 날 보고는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는 그전에도 말했지만 우드스탁 계열의 음악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새벽 세 시까지 무려 앰프 물린 베이스, 기타를 총동원해서 연습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있는 베란다로 올라왔고, 제니스 조플린이 어쩌고, 도어스가 어쩌고 하면서 썰을 풀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도어스의 짐 모리슨에 심취해 있었고, 그의 곡을 쳐달라고 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제니스 조플린의 곡은 외우지만 짐의 곡은 잘 모른다. 그저 그가 랭보나 니체나 잭 캐루악과 링크되어 있다는 단편적인 정보 정도다. 그나마도 제임스 덕분에 알게 된 것 뿐이다. 제임스는 잭 캐루악의 <길 위에서>를 읽고 여행을 떠나 방황하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나를 만났으니까. 젊은이여 서부로 가라, 라고 하면 정말 문자 그대로 서부로 가 버리는 행동력은 지금도 얄미울 정도로 감탄스럽다고 생각한다. 정작 작가는 여행을 떠나라는 소리가 아니라 사회의 획일성 때문에 인간이 가축화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가 꺼내놓는 여행담을 흥미롭게 들었었다.
그래서 조지안 할아버지가 짐 모리슨 얘기를 하면서 잭 캐루악 얘기를 꺼냈을 때는, 이 사람들은 어디서 이런 것들을 한 세트로 엮는 수업이라도 듣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알 수 없는 여자애가 자기 말을 잠자코 들어주는 것에, 그리고 어느 정도 추임새도 넣어주는 것에 신이 나 있었다. 쳇, 이 대화를 어떻게 끊지.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몇 년 전에 있었던 밤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도망칠 생각이야?”
“도망치다니, 뭘 도망친다고.”
“너 말이야.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도망칠 거야.”
그는 화가 나 있었다. 나는 오른쪽 손으로 턱 밑을 조금 긁고 딴청을 피웠다.
“속도 문제겠지. 내 속도와 네 속도가 일치하지 않는 거 말야. 네가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은 못 해봤니?”
“도대체 몇천 년이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원하는 것 하나 똑바로 못 바라본다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길을 헤메고 다닐 뿐이야. 미아일 뿐이라고.”
“그러는 너는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똑바로 걸어왔다고 말할 수 있어? 인간의 의지 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된다고? 결국 계획을 세워봤자, 운, 시대의 흐름, 다른 사람들의 영향력, 이런 것 때문에 방향이 바뀌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안 해봤어?”
“관두자. 너랑은 말이 안 통해.”
그는 손을 휘휘 저었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상처입은 기분이 들었다.
“말이 안 통하는 게 아니라, 관점이 다른 거잖아. 그 정도의 아량도 없는 거야, 날 이해할 노력 조차 하지 않겠다는 거 아냐?”
마지막 말을 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형식이 어찌 됐든,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가 두 조각이 나든, 이미 이 시점에서 나는 그에게서 밀쳐내진 것과 마찬가지라고.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 거냐, 라니 앞으로도 영원히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 있어. 세계는 넓으니까. 시간은 유한하니까. 설령 ‘도망자’로서의 인생을 기록하게 된다고 해도, 도망 그 자체는 성공적이잖아. 도망에 성공한 사람. 그것도 멋진 성취 아닌가.
베란다로 누군가가 나왔다. 담배를 손에 든 남자는 모리스였다. 어제 술을 잔뜩 마셔댄 덕에 한껏 풀려 있는 눈으로, 그는 우드스탁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비어있는 줄만 알았던 거실에는 로빈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직접 만 것이 분명한 담배를 손에 쥐고 있었고, 이쪽을 보지 않았다. 내가 우드스탁 할아버지가 던진 질문에 뭐라고 대꾸를 하면서 베란다와 거실을 연결하는 하얀 나무 문을 닫았기 때문에 들어온 사람이 나라는 것은 알았을 텐데 말이다. 어딘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한참 동안 우드스탁 할아버지와 이야기한 탓에, 포트의 물이 식어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뜨거웠다. 아마 모리스와 로빈이 내가 일어난 다음에 곧바로 일어나서 차라도 탄 모양이었다. 나는 포트를 쥐고 차를 내리고, 머그를 손에 쥐고 거실을 지나쳐서 우리가 주로 연습할 때 쓰고 있는 세 평 정도의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로빈이 나를 불렀다. 응? 하고 그쪽을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화라도 난 건가?
너무나 찔리는 일이 많다. 아니면 팀을 해체하자는 소리라도 할 생각인가. 공연 끝나고 다음 날 팀이 해체한 악몽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다. 이 대화에 참여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럴 때 사용하던 도피처인 베란다는 오늘은 모리스와 우드스탁 할아버지가 있다. 나는 로빈이 이쪽을 보고 있지 않은 점을 빌미로, 콧잔등을 한껏 찌푸렸다. 핑계를 댈 꺼리가 없다. 약속이 있다던가 잠깐 나갔다 오겠다던가 하는 순발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나는 그가 앉으라는 요청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순순히 응했다.
하란 대로 했는데도 그는 말이 없었다. 이쪽을 보지도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맞은 편의 하얀 벽을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어제 공연은,”이라고 말을 시작했다. 두려워하던 소재가 아닌 것에 안도한 나는, 그의 태도가 변하지 않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원래대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는 전혀 위협적이진 않았다. 니노가 어떻고, 부차가 어떻고, 마리아가 어떻고, 마리아가 그린 그림이 어떻고, 어제 공연은 어땠고 사장은 뭐라고 말했고, 라는 식으로 대화가 십 분인가 이어졌을 때 그는 기습적으로 파푸너 얘기를 꺼냈다.
그가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입을 떼는 순간, 나는 그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했다. 얘기하고 사실은 파푸너와 내가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고 만 것이다. 나의 얄팍한, ‘거짓말 아닌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