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현지 버스커 기오르기

이후로도 지겹도록 만나게 된다

by 위키별출신

[비상식적인 동유럽권 버스킹 여행]


나란 인간은 소심하다.

계획성 없음과 담대함과 과감함은 한 세트였으면 좋았으련만, 조지아 할머니의 용기백배에 기여하는 동전을 받았음에도, 얼굴에 철판깔기 기술은 좀처럼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파란눈과 녹색눈, 하얀 금발과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걷는 서양인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몇 번 버스킹을 실패했다. 그리고 내가 자리를 깔고 앉으면 호기심이 동했는지 바로 옆에 똑같이 자리를 펴고 앉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더욱 노래를 부르기가 어려웠다.


아마 세 번째 버스킹을 시도한 날이었을 거다. 길은 어둑했고 촘촘하던 사람의 무리는 뜸해졌으며 근처에서 그림을 팔던 무리도 장사를 접고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배가 툭 튀어나오고 사람 좋아보이는 조지아 아저씨가 조지아어로 뭐라고 하면서 술을 권하려고 하는 듯했지만 술을 잘하지 못하고 조지아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장소를 옮기리라 마음먹었다.


루스타빌리 역쪽으로 피아노를 들고 걸어가고 있는데 기타를 멘 젊고 이쁘장한(단발 길이의 금발에 파란눈) 남자애가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목적은 있지만 말하기는 부담스럽고 그래도 그냥 포기하기는 뭐해서 뱅뱅 도는 시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는 좀 망설이더니 말을 붙였다.


“이 피아노 네 거냐?” “너도 어디에서 연주하냐?” "어느 나라에서 왔고 얼마나 머무르냐? 어떤 곡을 치냐?"

알고 보니 그 역시 버스킹을 하고 있다고. 내가 ‘난 화가들이 많은 곳에서 연주하고 있었는데 연주하기 좀 불편해서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다.'고 말해주니 자기를 따라오란다.



sticker sticker


조금 두려웠지만... 그의 미모를 믿고 따라가기로 했다. 자고로 예쁜 얼굴에 예쁜 정신이 깃든다!!

는 아니고 그의 기타를 믿기로 했다. 음악하는 사람들의 특징. 꼴불견은 많지만 사심은 없다.


그가 나를 끌고 간 곳은 역에서 30m 떨어진 지하통로였다. 루스타빌리 역 근방으로 지하통로가 발전되어 있는 것이 트빌리시의 특징이다. 그리고 지하통로들은 몇 천년은 청소하지 않은 것 같은 역사적인 냄새와 주인을 잃고 헤메는 오래된 물건들이 즐비하다. 세금은 걷어서 청소에 쓰지는 않는 건가 싶을 정도로 지상과 지하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아니 그런 곳에 사람들 통행량도 많고 상점도 한두 개 박혀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무계획적이며 서쪽사람들과 달리 바닥에 기생하며 폭팔적으로 수를 늘리고 있는 온갖 바이러스에 대해서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살면서 단 한번도 사람들이 바닥에 뭘 깔고 앉는 걸 못봤다. 너바나의 존잘남 커트를 연상시키는 밝고 아리따움이 가득한 금발에 푸른 눈, 새하얀 피부에 섬섬옥수에는 기타를 쥔 그 남자 역시 바닥에 철퍽 주저앉았다. 미모가 아까운지고. 그의 이름은 기오르기.


우리는 즉석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조지아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나는 피아노로 중간에 코드를 대충 넣어주거나 꾸밈음을 넣어줬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곡이라 엄청 많이 틀렸다. 하지만 무계획별에서 온 기오르기는 전혀 신경쓰는 느낌이 아니었다. 완벽에 가깝지 않으면 소음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하는 동쪽사람들과 달리, 이쪽은 틀려도 그만~ 안 틀려도 그만이다. 연주가 끝나자 기오르기는 아이처럼 '와~'하고 물개박수를 치더니 나를 얼싸안았다.


(조지아 사람들은 껴안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기쁜 일,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물론 만나거나 헤어질 때도 항상 껴안는다. 나중에 카페에서 만난 푸른 머릿빛의 여자아이에게 이에 대해 언급하니 그녀는 '전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포옹'이라면서 손사래를 치며 싫어했다. -_-;)

나는 기오르기에게 “어떤 곡을 주로 연주하냐, 그 중에서 내가 아는 곡이 있으면 함께 연주할 수 있겠다. 아는 곡 중에서 팝송 없냐?”라면서 무슨 곡을 연주하고 있는지 채근했다. Fly to the moon이나 over the rainbow같은 대중적이고 올드한 노래를 연상하며 물은 것이었지만 그의 답변은 전혀 달랐다. 몇 곡을 예로 들었는데 전부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곡들이었다. 나라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듯 선호하는 팝송이 전혀 다른 모양. 그나마 근접한 곡이 Nirvana의 my girl이었는데 Nirvana를 좋아하는 나이건만 기억이 안 나는 곡이다. -_-;;

그렇게 엉망진창의 연주를 하던 중이었다. 키가 140cm 정도 되는 남자애가 기오르기에게 달려들어 진한 포옹을 했다. 이름은 산초. 내가 한국에서 키우던 왕관앵무새의 이름이 ‘산초’였기에 (너는 산초, 나는 돈키호테다 라는 생각으로 이름 지음-_-;;;) 나는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짧은 금발머리에 녹색 눈동자이고 이 아이 역시 엄청나게 예쁘게 생겼다. 둘은 아는 사이였다. 기오르기가 기타로 연주에 푹 빠져있는 사이 산초는 기오르기 앞에 서서 매니저 노릇을 한단다. 연주하는 앞에 서서 모자를 들고 사람들에게 팁을 강요한다. 일명 ‘햇잡’. “산초는 어려보이기 때문에 햇잡을 하면 팁이 쏟아지지.”라면서 기오르기가 산초의 실제 나이가 17살이라고 가르쳐줬다.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많게 봐도 10~11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어쩐지 두려워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앵벌이에 기여하게 된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물론 산초는 성년에 가까운 나이지만 겉보기에는 엄청나게 미성년자, 초등학교 6학년 정도로 밖에는 안 보인다. 산초의 유전자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연주가 끝나고 우리는 근처의 레스토랑에 갔다. 기오르기는 원래 루스타비라는, 트빌리시에서 약간 떨어진 곳 출신으로, 나이는 스물 두 살이었다. 서른 근방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숨을 죽이고 내 나이를 밝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말로만 듣던 서양인 조로 증상이 눈앞에 있었다. 그보다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는 것을 이 아이가 알게 된다면 도대체 어떤 반응을 할까? 기오르기는 음악을 하며 살고 싶었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를 이해해주지 않아, 어쩔수 없이 집을 나와 트빌리시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단다. 나는 '니 인생인데 왜 가족들이 그딴 식으로 구는지'에 대해서 물어봤고, 그는 '가족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사실 나에게는 심각한 병이 있기 때문에 걱정해서 말리는 거다'라고 말했다. 그와 구글번역기를 동원해 간신히 병명을 영어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는데, 무려 epilepsy. 즉 간질이었다.


간질이란 무엇인가? 팔 다리 고개가 무작위로 움직이는 발작이 있는 고통스런 병이 아닌가? 이런 심각한 병이 있는데도 음악을 계속하다니... 음악을 하다가 도중에 실신할 수도 있고 병원에 가야 할 일이 많을 텐데.버스킹으로 번 돈으로 간신히 생활비를 해결하고 있는 그에게 병원에 갈 돈이 있을 리 없다. 가만히 보니 기오르기와 산초가 입은 옷도 상당히 낡았다.

이 녀석들, 대체 어디에서 생활하고 있는 게냐...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조지아인들의 손님 환대 전통을 기오르기 역시 끝끝내 지키고 싶어했다. 오늘 버스킹으로 많은 돈을 번 것도 아니고, 금전적으로 결코 좋은 상태가 아닐 텐데도 그는 우리가 함께 먹은 킨칼리를 내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혼자 계산해버렸다. 이후 근처의 <다이브 바>에 가자는 그의 권유에,나는 여기서 답례를 하리라 굳게 마음을 먹고 가겠다고 했다. 결론적으로는 실패했다. 기오르기가 맥주를 선불로 지불해 버렸기 때문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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