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모든 것으로부터 무감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노력했다. 그랬더니 한동안 사는 것이 수월해지긴 했었다. 그러면서도 저녁이면 이유 없이 헛헛해지거나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잠들기가 어려워지고 결국은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서 감정이 한꺼번에 터지는 경험도 했다. 예민함을 없애기 위해 나를 일부러 깎아내기보다는 예민함을 인정하면서도 무감한 척 연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촉수를 정말 필요한 곳에 쓸 때, 무감해지던 때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도 말이다. 물론 때와 상황을 파악하는 일이 먼저겠지만.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나,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특히 개성이 강하거나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다수에게서 거부되거나 배척당하는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다양성을 말하면서도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다수 속에서 개별성을 드러내는 일은 여전히 두렵고, 소수가 겪는 상처는 깊지만 쉽게 치유되기 힘든 사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감은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무조건적인 무감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보면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배려하지 않는 태도 앞에서 어떤 반응을 선택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무감한 척 하지만 그것이 배려 없는 태도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남긴다거나 -이럴 때 문학적 표현, 문학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모르겠어, 라기보다는 알지만 괜찮아, 혹은 마음이 상했지만 괜찮아,라는 표현을 해보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도 그 말을 해 보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마음 중에서 상처받은 마음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스스로가 상처받았구나, 그랬구나, 토닥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하며 무감이라는 보호막을 만들어야 한다. 외부로부터의 상처보다 이후에 내가 나에게 가하는 두 번째 상처가 더 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를 깎고 무뎌져 전혀 다른 내가 되어버리거나 혹은 정체성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닌, 나의 개별성을 지키면서도 타인과 타협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 사건은 기억하지만 당시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비슷한 일이 반복되어도 나를 잃지 않기 위한, 용기 있고 따뜻한 무감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