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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Dec 14. 2021

책 <작별하지 않는다>, 참혹이 새겨진 삶에 대하여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문학동네
2021년 9월





제주 4.3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작품.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추천사가 이 작품을 오롯이 담아낸다. 이보다 더 분명하게 <작별하지 않는다>를 말할 길이 있을까.


「 학살 이후 실종된 가족을 찾기 위한 생존자의 길고 고요한 투쟁의 서사가 있다. 공간적으로는 제주에서 경산에 이르고, 시간적으로는 반세기를 넘긴다. 폭력에 훼손되고 공포에 짓눌려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작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딸의 눈과 입을 통해 전해진다.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들 곁의 소설가 ‘나’는 생사의 경계 혹은 그 너머에 도달하고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만한 고통만이 진실에 이를 자격을 준다는 듯이,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라는 듯이. 재현의 윤리에 대한 가장 결연한 답변이 여기에 있다. 」






작가는 학살 그 자체보다 그 이후 남아 이어지고 흐르는 시간을 견뎌내는 이들을 조명하는 방식으로 학살을 말한다. 내가 겪은 고통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가족의 죽음을 끊임없이 뼈에 새기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던 삶들에 대해서.


그 삶에 대해 '학살의 위기를 넘겼지만,'이라고 쓰다가 멈췄다. 그들의 삶을 두고 과연, '학살의 위기를 넘겼다' '학살에서 예외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곳에 존재했던 모든 이들은, 당장의 폭력과 총알을 모면했다 하더라도, 결국 그날 다른 피해자들과 운명을 같이 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무참한 광경을 목도하고, 그 장면장면을 잊을 길 없이 평생토록 되새김질해야 했던 삶이라면…… 그때 목숨을 건져 또 한 번의 삶을 얻은 게 아닌, 단지 두 번째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게 아니었을지. '죽은 사람'과 '죽은 것과 다름없이 산 사람'의 결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이조차도 너무 멀리 넘겨짚은 것 같다. 지금 여기, 이 시간대의 나로서는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아 손이 곱는다. 세상 어떤 말로도 그 참혹을 서술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쓰는 이 마음이 허위처럼 느껴진다.












눈을 뜨자 여전한 정적과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우리 사이에 떠 있는 것 같다. 결속한 가지들 사이로 우리가 삼킨 말들이 밀봉되고 있는 것 같다.

(243쪽)



그 어린것이 집까지 기어오멍 무신 생각을 해시크냐? 어멍 아방은 숨 끊어져그네 옆에 누웡 이신디 캄캄한 보리왓에서 집까지 올 적에난, 심부름 간 언니들이 돌아올 걸 생각해실 거 아니라? 언니들이 저를 구해줄 거라 생각해실 거 아니라?

(252쪽)



두 개의 스웨터와 두 개의 코트로도 막을 수 없는 추위가 느껴진다. 바깥이 아니라 가슴 안쪽에서 시작된 것 같은 한기다. 몸이 떨리고, 내 손과 함께 흔들린 불꽃의 음영에 방안의 모든 것이 술렁인 순간 나는 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것인지 물었을 때 인선이 즉시 부인한 이유를.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

(286-287쪽)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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