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시면 Jun 06. 2023

01. 말하고자 하는 욕구와 사람들의 관심 또는 호기심

심연: 찢어진 마음 들여다보기

  내가 무슨 일이 생겼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왜? 왜? 무슨 일인데?”라고 물어보기 시작한다. 단순히 친구와 싸웠을 때나 오늘 어떤 가게를 갔는데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면 나도 신나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맞장구와 공감을 통해 마음을 풀곤 한다.

그러나 정말 정말 큰일이 발생하였을 때도 단순한 가십거리로 질문하고 “어머머!”하며 리액션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당시 의료사고로 한참을 고통받고 있었다.(물론 지금도)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나 털어놓진 못했기에 나의 관계 중 꽤 친하고 깊고 오래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 친구의 반응은 “엥? 그게 무슨 소리야?”, “헐! 미친 무슨 그런 일이!”, “그 의사가 뭐래?”, “답이 없네...”, “너 어떡하냐… 힘내라” 와 같은 말이 주였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역시 이래서 수술도 함부로 하면 안 돼! 널 보니 난 더 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맞아, 맞아. 역시 몸에 칼 대서 좋은 건 없구나 싶어. 나도 아직 수술할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나는 ‘아직 이 자리에 있는데 왜 내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하지? 놀리는 것도 아니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의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에 따라 대화의 내용은 자연스레 다른 화제로 돌아갔지만 그 순간 누구의 선례 또는 실험 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친구들이 나의 일을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여기는 것 같은 모습에 얄미운 마음도 있지만 밉진 않았다. 그 친구들이 이 사건의 원인은 아니니까. 그러나 나도 그 자리에서 “어머머!”와 같은 리액션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안다. 꽤 좋은 생각은 아니라는 걸. 당시 나는 정말 그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만큼 정말 간절했다. 그건 나 대신 누군가가 아프길 바라는 마음이 아닌 순전히 이 일이 내일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더 이상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아서 점점 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혹여나 내가 그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어서 멀어지려 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일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게 본능이었는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 참아내기 시작하면서 속은 썩고 곪아 터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려보기도 하고 익명의 오픈 채팅방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인터넷 카페는 누군가에게 공감을 위해서 활동하는 게 아닌 정보를 얻으려고 활동하는 사람이 많았던 만큼 전부 어느 병원이냐고 알려달라고 비밀 댓글에 채팅, 쪽지를 무수히 보냈다. 처음에는 나와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상세히 알려주고 병원을 알아볼 때 주의해야 할 점도 같이 알려주었다. 그러나 점점 많은 사람을 상대하면서 나의 상처를 상기시키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고 병원을 알려줘도 아무런 답변이나 인사도 없이 질문마저 삭제하고 달아나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나는 그걸 ‘병물튀’(병원 물어보고 튀기)라고 불렀다. 그로 인해 인터넷상에서도 실험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고 점점 더 피폐해져 가 그만두게 되었다.

 

 익명의 오픈 채팅방은 우울증 관련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몇 백 명 단위로 모인 대규모의 방이었다. 여러 사람의 슬픈 이야기들이 무수히 쏟아지는 만큼 얘기할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하는데 안 좋은 타이밍에 말하면 허공에 묻히기 일쑤였다. 의료사고의 내용은 궁금하였는지 어떤 수술인지 집요하게 물어보는 사람은 많았지만 문제 자체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는지 아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는지 다들 어떠한 답변도 해주지 못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더 답변해 주기 편한 주제가 나타나면 그 사람에게 집중되고 나는 결국 사람들의 궁금증만 채우고 끝나는 꼴이 되었다. 그쯤 되었을 때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제공해 주는 사람인가라는 망연자실감이 들기도 했다.

 

 가끔, 정말 가끔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는 사람이 나타나곤 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가늠이 안된다. 정말 많이 고생하셨다’ 등의 위로를 해주곤 한다. 그분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지만 부족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위로 몇 마디로 이 일이 해결되는 것도 내 마음이 해소되는 것도 아닌 것을 알면서 나는 왜 내 이야기를 하는 것에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는 답답해서 그냥 말하는 건지,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 건지 내 마음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갈증 같은 느낌이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한 명의 사람을 위해 몇 십 명에게 가십을 제공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나는 오늘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 헤매곤 한다. 어쩌면 인간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본능이라서 그런 걸 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심연: 찢어진 마음 들여다보기 - 첫인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