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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yss Aug 22. 2023

꼿꼿한 인간들의 세계

스테잉 버티컬(Rester vertical, 2016)


당황스러웠다. 이 영화는 뭐지? 영화 중반부까지도, 그 당혹감을 놓지 못하고 헤맸다. 어떤 온도도, 경도도 느껴지지 않는 기묘한 물성의 영화. <스테잉 버티컬>의 첫인상은 그랬다. 감독 알랭 기로디의 스타일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는 데 조금 익숙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최신작인 <노바디즈 히어로>를 볼 때 너무 피곤했고, 아주 꿀잠을 잤던 사람이므로...... 초반의 방황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가진 극히 자유로운 스타일의 정체를 탐구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편안히 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에 초점을 맞추며 영화를 바라보면 감상은 조금 더 쉬워진다. 인물에 집중한다고 해서 완전히 동화되지 않도록 영화가 충분한 거리감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해하려는 시도만 한다면 얼마든지 적정한 거리에서 인물들을 파악하고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주인공인 레오는 떠돌이 영화감독이다.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양치기 마리를 만나고, 소년 요안과 그의 조부를 만난다. 레오는 마리와 육체관계를 가지고 그 결과로 아이도 태어나지만, 레오와 마리의 관계는 깊고 열정적인 관계라고는 할 수 없다. 요안과 그의 조부, 그리고 레오가 갖는 관계도 마찬가지다. 레오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대한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고, 내주지도 않는다. 어떤 평론가는 <스테잉 버티컬>이 관계에 대한 영화라고 설명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피상적인 관계만을 만들고, 그것이 피상적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형태로 쉽게 변질되도록 방치하는 한 개인에 대한 영화라고 보았다. 레오는 직업적인 열정도, 인간관계에 대한 열정도 모두 가지지 않고 한 치 앞의 문제만 해결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영화 초반 레오와 마리가 처음 조우하는 장면에서, 마리는 늑대가 양을 잡아먹기 때문에 나쁘다고 말하고, 레오는 어차피 사람도 양을 도축하기 위해 기르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반박한다. (늑대와 양의 이야기는 영화 후반부에서 한 번 더 등장하는 것을 보아 <스테잉 버티컬>에서 꽤 중요한 상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 이 대화는 미묘하고, 레오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짚고 넘어갈 수 있는 점은, 레오의 말은 양비론이라는 말이다. 마리가 '늑대는 나쁘다'라고 얘기했을 때, 마리는 당연한 자연의 순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리의 입장에서, 늑대는 해가 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레오는 이 맥락을 전혀 무시한 채, '늑대나 사람이나 모두 나쁘다'라고 단언해 버린다. 레오의 말에는 양을 기르는 사람들의 입장에 대한 고려가 없다. 이 대화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확장해 읽어 보자. 객관적으로 나쁜 사람은, 물론 세상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일반적인 기준에서 그러할 뿐,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을 상정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나에게 나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쉽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이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려해야 할 것은, 이 사람이 절대적으로 나쁜 존재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이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인가, 하는 문제이다.


  주관적으로 해가 되는 사람. 주관적으로, 교제하면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 그것에 대한 경계와 개념이 레오에게는 부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레오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사람을 구별해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자신이 해가 된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얼기설기 관계를 얽어 나간다. 그렇다면 레오가 어찌 보면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관계가 매우 피상적이고 무의미한데도, 레오가 계속해서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서사 안에서 찾기는 어렵다. 애초에 이 영화는 명확한 스토리라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가지 추측을 해 보자면, 레오는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는 것 외에는 존재감을 확립하기 어려운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레오는 또한 방랑하는 사람이다. 아니, 방랑인지 방황인지 모를 것들을 한다. 레오를 한 곳에 정착시키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동하게 하는 근본적 원인은 홀로 땅 위에 딛고 서 있지 못하는 불안감과 결핍이 뒤섞인 그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레오는 동반자가 필요했다. 지속적인 동반자가 아닌, 순간순간의 실존적 불안감을 해결해 줄 누군가가.




  <스테잉 버티컬>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불편할 정도의 성기 클로즈업. 이는 분만 장면의 클로즈업과도 일맥상통한다. 자연스러움을 넘어선, 과도한 클로즈업은 관객이 그 이유를 알아차리기 전에 먼저 강력한 시각적 충격을 주며, 가림막 없이 날것 그대로의 피사체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 이상을 가진다. 오히려 이 클로즈업은 영화 안에서, 인간이란 어떤 내재적 온기를 가진 말랑하고 따뜻한 존재가 아니라 결국 그들도 생생한 동물이라는 사실을 시사하며 작동한다. 인간에 대해 기대감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레오의 생각 그대로 말이다. 다른 한 장면은 바로 광활한 초원의 장면이다. <스테잉 버티컬>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공간은 바로 이 초원인데, 양과 늑대가 공존하는 가운데에도 여전히 텅 비어 있는 드넓은 초원의 이미지는 레오의 공허감과 막막함을 잘 표현한다. 레오는 많은 공간을 돌아다니지만 결국 시작했던 지점인 초원으로 돌아온다. 캐릭터의 성격과 가치관 변화가 주된 영화의 소재인 여타의 영화들과 달리, 레오는 시작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공허를 가지고 관계를 갈망하는 인물인 것이다. 레오의 이런 성격은 초반 아이에게 집착하는 성향, 그리고 아이를 잃고는 어린 양을 끌어안고 잠드는 습관을 통해 잘 드러난다.




  양과 늑대. 이 도식에서 레오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우선 이 점을 고민하기 전에, 이 도식 안에 레오를 집어넣는 것이 억지스러운 공식화가 아닌가 의심해 봐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늑대 떼를 만나며, '꼿꼿이 서 있을 것'을 말하는 레오는 분명 양의 위치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코 레오는 양의 인간이 아니다. 레오는 양도 늑대도 아닌 인간이다. 앞서 서술한 클로즈업 장면에 대해, 감독은 인간 역시 똑같은 동물일 뿐이라는 -초반 레오의 논리와 유사한- 논리를 주장하는 듯했으나, 이 마지막 테이크를 통해 감독은 이 명제를 완전히 뒤집는다. 인간은 서로 공격하고 해를 입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쌍방의 매커니즘 안에서 이루어지고, 무엇보다 인간은 인간을 잡아먹지 않는다. 숨통을 끊어 놓고 생을 끝장내지 않는다. 종종 예외의 경우가 보이나 그것은 양과 늑대의 관계보다는 분명히 덜 일방적이다. 이 정도의 차이가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다. 감독이 마지막에 방점을 찍으며 강조했던 바, 인간은 꼿꼿한 생물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꼿꼿한 생물이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꼿꼿한 생물이다. 인간은 늑대와 마주하면, 양처럼 도망가거나 멀뚱히 서 있지 않고, 겁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저 중력을 버티고 서 있어야 한다. 허세를 부려야 한다. 이 세계는 그렇게 허세를 부리며 꼿꼿이 서 있는 사람들의 세계다. 그렇기에 모두가 가련하고, 비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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