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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yss Aug 22. 2023

수족관을 짓듯이 영화를 만드는 방법

더 웨일(The Whale, 2022)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일종의 유물론자처럼 보인다. 그는 인간을 육체의 반응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처럼 묘사한다. 그의 영화는 종종 폐쇄적 성격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왔고, 해당 인물의 심리와 감정이라는 육체의 반응이 곧 작품의 스토리와 연출이 된다. 가장 유명한 <블랙 스완>도 그러하고, 조금 더 초기작인 <레퀴엠>을 떠올려 보아도 그렇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확실히 인간의 '정신적 닫힌 상태'에 흥미를 가지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자학하며 무너지는 인물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비극인데, 그 비극을 최대한 세세하게 묘사해 나아가 곧장 관객의 감각적 반응으로 이어지도록 연출하는 그의 태도에서는 일종의 유희적 성격마저도 발견되는 듯하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작품의 다른 주인공들처럼 '닫힌 사람'인 찰리는 동시에 병든 사람이다. 그의 정신과 육체는 병들어 있다. 그는 연인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겪으며 극도로 우울한 시간을 겪었다. 또한 그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어려워 그 고통에 수몰되는 쪽을 택했다. 죽음을 목전에 둘 정도로 각종 신체적 병세가 심화되었지만, 그는 "돈이 없다"는 거짓 핑계를 대며 병원에 가라는 친구 리즈의 명령 같은 조언을 한사코 거절한다. 그리고 괴로워지면 자학하듯 음식을 먹어치운다. 작품 속에서 또한 흥미로운 지점은 또한 음식을 먹을 때의 찰리의 표정이다. 부정적인 상황, 그리고 촉발되는 부정적인 감정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먹을 때 찰리의 표정은 희열에 가득 찬 것처럼 보이며, 나아가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여기서 읽을 수 있는 바는 자학의 도피적이고 자위적인 측면이다. 특히 자위적 측면이라고 했을 때, <더 웨일>의 첫 번째 시퀀스가 찰리의 자위 장면이라는 것은 이 점에서 중요하다. 찰리는 병원에 갈 생각이 없고, 괴로울 때마다 폭식하는 버릇을 고칠 생각이 없으며, 영영 이 고통 속에 잠긴 채로 죽음을 맞고 싶어 한다. 그가 멈추지 않고 지속하는 여타의 자학 행위들이 그에게 현실도피적 성격의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약과 무용 등 제재가 주제와 훌륭히 융합했던 감독의 전작과는 다르게 <더 웨일>은 글쓰기, 종교와 같은 소주제들이 영화와 잘 융합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글쓰기의 테마가 사용된 이유는, 아마도 '솔직해지라'는 찰리의 태도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작중에서 찰리는 가장 '솔직하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시종일관 회피한다. 무엇보다 그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보다는 긍정한다. 하여 그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찰리의 주장과 찰리라는 인물이 근본적으로 대비된다는 점에서 역설을 자아내는 측면은 어렴풋 있지만 이것이 그가 에세이에 집착할 이유가 되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누군가는 솔직함의 태도로 정의되는 에세이스트의 태도가 곧 자기구원의 실마리이며 그것이 <더 웨일>의 주제라고 읽기도 한다. <더 웨일>에서 찰리의 친구이자 간호사인 리즈는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구원하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찰리는 엘리가 토마스를 구원한 경우를 들며 이를 부정한다. 여기서 이전에 언급한 에세이스트의 태도, 솔직함의 태도는 다시 대두된다. 엘리가 토마스의 본모습을 까발리며 그를 구원한 것처럼, 찰리는 카메라를 가린 채 온라인으로 강의하던 학생들에게 자신의 '역겹다고 생각이 될 만한' 몸을 보여 주며 스스로를 까발린다. 하지만 정말 그 순간 그는 구원받았는가? 혹은 스스로를 구원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다 보면 결국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더 웨일>에는 애초에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더 웨일>도, <더 웨일>의 창작자인 대런 아로노포스키도,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흥미도 없다고 조금은 손쉽게 평하고자 한다.




 감독이 <더 웨일>을 통해 의도하고자 한 반응은 불쾌감이었는지, 연민이었는지, 혹은 그 둘 다였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누군가의 비극을 세세하게 전시하며 이 창작자가 이루고자, 얻고자, 전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인가. 창조된 비극, 혹은 우화를 보며 우리는 어떤 것을 마땅히 느껴야 하는가? 혹은 어떤 감정을 느껴도 될 만한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찰리를 비난하기에 그는 너무 가련하다. 찰리를 연민하기에 그는 죄를 지었다. 그렇다면 관객들이 도착하고야 마는 이 딜레마를 설계하고 유도한 자는 누구이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 〈더 웨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장, "Be honest."를 떠올려 보자. 캐릭터를 일그러뜨리고 학대하며 작품을 통해 외친 그 문장에 대하여. 그러나 작품과 자신 사이에, 그리고 관객과 자신 사이에 투명한 유리벽을 두고 모두를 관망하는 듯한 조물주의 태도를 유지하는 창작자는 정직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대런 아로노포스키는 카메라, 즉 촬영을 통해 형성된 거리감을 일종의 권력처럼 이용했다. 하지만 수족관의 고래가 관람객의 눈요기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는 아니고, 창작물의 캐릭터 역시 그저 관객과 창작자에게 고통을 전시하려고 태어나는 존재는 아닐 것이라 나는 그에게 말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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