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위 안전지대

영화 속에 숨어 울던 아무개의 시간

by Abyss
K0000034_1%5BS800%2C800%5D.jpg 친절한 금자 씨


“여러분에게 열아홉 살 금자를 보여 주고 싶다.”


영화 <친절한 금자 씨>의 이 대사에는 내내 구경자의 위치이던 내래이션의 화자가 영화 속에 참여하게 되는 순간이 담겨 있다. 실제로 각본을 담당한 정서경 작가는 이 대사를 쓰고 나서, ‘아, 이건 제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한다.










2_tistory_2008_11_23_05_50_492870a7bf326?original 파니 핑크


말하자면 나도 이 글로 스무 살의 나를 보여 주고 싶다. 스물은 내가 영화를 많이 보고, 한 편을 돌려보는 경험을 시작한 나이이다. 장소는 영화관이 아닌 집이었는데, 명절 때가 아니면 굳이 집에서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당시 나에게는 꽤나 유다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도 없었다. 나 혼자서 소파에 누웠다 앉았다, 고양이와 바닥을 굴렀다, 짐볼을 타고 위아래로 펌프질을 했다 하며 나는 <친절한 금자 씨>,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비밀은 없다> 등의 영화를 열심히 보았다.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어쩐지 영화를 볼 때는 주로 혼자였기에 TV 앞에 가져다 둔 곽휴지로 눈물 젖은 얼굴을 문질러 닦아도, 유쾌하지 않은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 재생해도 거칠 일이 없었다. 종일 영화를 보느라 현기증이 일고, 쾌적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TV 앞에 있을 때는 하루하루가 쉽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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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 킬 빌


스무 살의 내가 같은 영화를 돌려보았던 것은 영화 속 인물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고, 시간이 흐른 나는 느꼈다. 테이프였다면 늘어질 정도로 반복한 영화들에는 하나같이 전과자나 살인범, 누군가에게는 비난받을 만한 여자들이 등장했다. 고통을 품고 극복을 갈망하나 평안에 도달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여자들. 영화 속 인물을 사람이라기보다는 감독의 오브제로 보는 버릇이 심해진 지금과는 다르게 스무 살 내가 소파 위에서 만난 여자들은 나에게 모두 공평한 타인이었다. 마음껏 관찰이 가능했고, 그래서 더 자유롭게 공감하고 쉽게 응원할 수 있었던.











image.png?type=w800 백만엔걸 스즈코


애정어린 관찰과 공감, 지지 같은 건 사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세상에게 돌려받고 싶은 태도였을 것이다. 영화들은 내가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울 수 있게 두었다. 이것은 아무개의 이야기인데, 하는 식이었다. 들뜬 사람들로 떠들썩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주지 않았던 편안함을 좋아했다.


TV가 놓인 대낮의 거실은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려도 빛이 환했다. 그에 비해 내가 고른 영화들은 대개 어두워서, 계속 보다 보면 나는 때로 어두운 화면에 반사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순간에 마주치는 것은 자신의 얼굴보다는 외로움일 것이다. 그러나 고립은 강렬한 몰입과 진심어린 응원을 이끌어냈다. 스무 살의 내가 금자 씨나 마츠코에게 보낸 위로와 지지는 화면에 반사되어 느릿느릿 나에게 와닿은 게 아닐까. 마치 <친절한 금자 씨>의 내래이션의 정체를 각본을 쓰던 중 알게 된 작가처럼, 지금에야 이 글을 쓰게 만든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뒤늦게 알아챈 것 같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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