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과 영화 놀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기 시작하며 어느새 나는 어떤 놀이로서 영화 보기를 즐기게 되었다. 그 중 ‘도장깨기’ 놀이란 재미있게 본 영화의 감독이 연출한 다른 영화들도 하나하나 찾아서 감상하는 것이다. 왓챠피디아의 분홍색 예상 별점을 내가 평가한 노란색 별점으로 모두 바꾸는 쾌감이 있었다. 그리고 ‘도장깨기’ 놀이는 점점 다른 방식의 감상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이때쯤 영화 속을 자유자재로 관장하면서도 영화 밖에 고고히 존재하는 감독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 편의 영화가 단어나 문장처럼 다가왔다면, 필모그래피의 다른 영화들까지 두루두루 살피는 것은 더 풍성한 이야기를 더듬는 과정 같았다. 영화를 만든 감독만큼이나 자유롭게 배치하고 해석하는 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독해였다.
시작은 가벼운 의문들이었다. 이를테면 박찬욱의 복수 3부작 중 어째서 <친절한 금자 씨>가 나에게 압도적인 명작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같은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나온 애니메이션 영화인데, 어떤 것은 유명세에 비해 와닿지 않고 어떤 것은 그 반대일까? 이런 의문들로 돋보기나 모종삽을 꺼내 들고 영화 안팎을 살피다 보면 꼭 내가 찾던 답이 불쑥 나타나곤 했다. 스크린으로 다섯 번째 보는 장면 밖, 나무위키나 제작진의 원문 인터뷰나 닉네임밖에 모르는 사람의 코멘트에도 내가 그토록 허전해하며 찾고 있던 조각은 종종 발견되었다. 그 조각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진 않았다. 앞뒤를 못내 궁금해하는 사람들, 그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무시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단비였다.
그 단비의 즐거움까지 나를 이끌었던 동력은 단연 오타쿠적 기질이었다. ‘도장깨기’ 등의 놀이를 시작하게 했던 내 안의 씨앗 말이다. 굳이 인터넷을 뒤져서 가사도 모르는 브릿락을 MP3에 쑤셔넣는 어린이와 청소년 사이의 무언가는 자라서 한 번쯤 이런 어른이 되는 걸까? 지금도 그렇듯, 이때의 나도 영화학자나 시네필이 아니었다. 권위있는 랭킹이나 객관적인 증명보다도 내가 던진 질문에 마음껏 몰두해 탐구하는 과정을 즐겼다. 다만 내 마음에 드는 답을 찾을 뿐이었다. 가벼운 집착과 깊은 애호로 가득한 시간들 속에서.
물론 나는 지금도 영화를 애호한다. 그러나 가장 시간이 많던 시기, 영화 애호가-혹은 영화 오타쿠-로 거듭났던 일은 또한 나를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여러 가지를 애호하게 된 셈이다. 애호는 정말 놀이의 감각과 비슷한 데가 있다(나에게는 취미와는 결코 다른 영역으로 존재한다.) 가벼운 즐거움을 즐기되 그 향유에는 적극적일 것, 억울하게 마주치는 꽝!도 웃어넘길 것, 그런 사랑과 애호의 방식을 조금씩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지 않을까...... 라고 마무리한다면 너무 거창해질까? 그러나 애호의 대상을 통해 거창한 삶의 태도까지도 배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이것이 내가 체득한 오타쿠의 가장 근사한 정의이다. 그리고 나는 이 답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