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껴보는 집
작고, 낮고, 느리게, 라는 부제가 달린 <구마 겐고, 건축을 말하다>라는 책은
구마 겐고 건축 철학의 뿌리이자 토대가 된 장소에 대한 사유를 담은 책이다.
그는 스스로를 나무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며, '나무 같은 존재'라는 표현은
'흔적'을 남기면서 살아간다는 뜻이라 말한다.
그의 사유를 읽으면서 문득 내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나이가 드니, 오래된 건물도 늙어서 보기가 싫고, 오래된 옷도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후즐근해져서 손길이 안 가네.'
'오래 되어도 보기 좋은 건 나무 밖에 없구나.'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나의 장소들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나의 첫 장소는 강원도 오지의 어느 셋방으로 기억한다.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와 어린 나이의 새색시 어머니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나, 셋은
땔깜으로 난방을 해야 했던 옛집의 방 한 칸을 빌려 거주하였다.
때로 주인집 어른들이 날 데리고 가서 놀아주시기도 했던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르는 집, 어린 새색시는 주인집에 잘 보이고 싶으셨을까.
열심히 툇마루를 걸레질하던 내 어머니의 모습도 생각난다.
초등학교 6학년 즈음엔 군인아파트에 거주하며 소파며 비디오며 신문물을 사들이셨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사진에 취미를 붙이셨던 아버지는 큰 딸을 모델로 하여 열심히 셔터를 누르셨다.
딸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실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미리미리 추억을 사진 속에 담고 싶으셨던 것일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정착한 곳은 어머니의 고향인 대구에 자리한 고층아파트.
아버지 직장을 따라 시골을 떠돌다 대도시 고층아파트에 처음 살아보게 되었다.
학교 다녀오면 단정히 정돈된 집이 마음에 들기도 하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집은 갈색빛으로 기억된다.
안정된 듯 보이지만 무언가 불안한, 무언가 결핍된.
내 사춘기가 시작된 그 집의 이미지는 그 당시의 내 마음의 이미지가 아닐까.
신혼 첫 집은 김포공항이 인접해있던 지하철 종착역 인근의 17평 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주방이 바로 보이는, 모든 것이 한 손에 들어오는 그 곳에서
나는 사랑을 했고, 첫 아이를 만났다.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 창원으로 이주하였다.
네 가구가 나란히 있던 복도식 아파트에서 둘째 아이를 출산하였다.
여름이면 네 가구 모두 현관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두 아이는 복도를 놀이터 삼아 자전거를 탔고, 복도를 따라 있던 네 가구의 이쪽 저쪽을 마음대로 들락날락하였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평온하다.
방이 네 칸인 아파트를 마련하였다. 화장실도 두 개다.
아이들에게 본인만의 방을 선사하였과 남편과 나도 각자의 방을 얻었다.
어머니는 주방 창문을 통해 보이는 산길을 가리키며, 이 집이 얼마나 길한지
입이 마르도록 이모들께 설명하셨다.
나는 그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우리 가족들도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피할 수는 없었다.
나만 빼고 세 명 모두 확진이다.
출근을 위해 임시 숙소에서 열 흘을 머물렀다.
처음엔 청소할 필요도 없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깔끔하게 정돈된 곳에서
한편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몸의 기가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오늘 그 집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을까.
구마 겐고는 인간 자체가 장소의 산물이라 했다.
태어난 장소, 살았던 장소, 공부를 했던 장소,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해준 장소가
인간을 이루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나무 같은 존재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던, 나이들어 보기 좋은 건 나무 밖에 없다 하셨는데
나이 들어서도 보기 좋은 나무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작고, 낮고, 느리게 살면서 그 방법을 깨우치게 될까.
나무를 키워준 흙, 물, 빛, 바람이 나무의 모습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면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구마 겐고는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했다.
'그 어떤 사람도 섬이 아니다.'
영국 시인의 표현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2021.3.21.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