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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맥주가 있었다.

by 나무처럼

9월의 도쿄는 여전히 무더웠다.

그래, 짐작은 했었지만 기대 이상이군.

이 끈적끈적함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동료 네 명과 함께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전부터 가장 기대하였던 곳은 맥주공장 아사히 본사였다.

나마비루의 도시, 도쿄에서 마시는 맥주 맛은 어떠할까.

내 영혼까지 촉촉히 적셔줄까.


미세하게 균열되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 일상의 틈을 메워줄 것인가.

습하고도 낯선 도시의 맥주공장 본사에서 생명수 한모금을 경험하는 일이

호락호락하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어렵게 어렵게 찾아갔지만, 하필 그날은 단체예약으로 자리가 없어 개인에게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대로 포기할 것인가.

다음날 하루 일정을 마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밤늦게 다시 아사히 본사를 찾았다.

이웃나라에서 직접 찾아온 이방인들에게 도쿄 하늘도 무심치는 않으시구나.


어느 소설가는 '밤은 부드러워, 마셔'라고 했던가.

도쿄의 밤도 나마비루도 부드럽게 우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맥주는 혀끝으로만 맛보는 게 아니구나.


<그때, 맥주가 있었다>라는 책은 역사를 빚은 유럽 맥주 이야기다.

맥주를 매개로 한 역사서, 맥주를 통해 우리 삶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책이다.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술, 맥주에 담긴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맥주의 역사는 경작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인류는 발아한 보리가 달콤한 맛을 내며 발효가 잘 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다.

이란고원에서 발견된 석기시대의 토기에서 발효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하니

맥주는 빵보다도 역사가 깊은 식품이다.


수메르인은 기원전 4000년부터 맥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1세기에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게르만인은 전쟁과 평화, 부족 구성원의 사형 같은 중대 사안을 결정할 때 맥주를 많이 마시고, 이튿날 다시 모여 결정 사항에 대해 한 번 더 의논한다고 그의 저서에 적었다.


로마 제국이 붕괴한 후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고 기아가 닥치면서 식음문화는 주린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중세 초기 로마 가톨릭교회는 로마제국의 전통을 대부분 계승하면서 맥주가 야만적이고 천박한 술이라는 생각 역시 이어졌다.


지금도 맥주에는 '취하려고 마시는 대량 생산 제품'이라는 낙인이 일부 찍혀 있다.

하지만 맥주의 세상은 그보다 훨씬 다채롭다.

다양한 시대의 문화의 이념, 사회 변혁과 결제 활동이 맥주와 긴밀하게 얽혀있다.

포도주를 마시는 곳에 시와 철학이 있었다면, 맥주를 권하고 마시는 곳에는 거사가 함께했다.


라거, 다크라거, 에일, 스타우트로 크게 분류할 수 있는 맥주는 스포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축구.

주류 기업과 축구의 긴밀한 공생 관계는 축구 경기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영국 리그는 1888년에 출범하였는데, 불과 몇십 년 만에 대부분의 팀이 주류 기업의 후원을 받았다. 경제적 지원의 대가로 기업들은 관중에게 맥주를 판매하고 경기장에서 자사 제품을 광고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축구와 맥주는 둘 다 폭넓은 대중을 타깃으로 삼으며, 특히 18~35세 남성이라는 핵심 공략층이 일치한다.


그렇지만 이제 어느 누가 맥주를 젊은 남자의 대표 술이라 하겠는가.

쉰 넘은 여자인 나도 오늘 저녁 소파에 기대어 맥주 한 캔을 따서 아시안게임 16강

한국 대 키르기스스탄 축구경기를 열심히 볼지언데.

국산 맥주를 마실까, 수입 맥주를 마실까.

여성들에게 한창 인기있는 남자배우가 광고하는 라거 맥주, 켈리를 마실 것인가,

이것이 과연 와인인가, 맥주인가, 정체성이 궁금한 듀체스 드 브르고뉴 벨기에 맥주를 마실 것인가.

안주는 역시 치킨이겠지? 아니아니 의외로 어묵탕도 나쁘지 않지.

무슨 소리, 고전적인 마른 안주가 최적이지 않나?

행복한 고민이 시작된다.


'수많은 맥주잔이 오고 간 뒤에 인간의 많은 역사가 빚어졌다.

맥주가 없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광고 문안이 새삼 눈에 띈다.

오늘밤 나는 맥주와 함께 어떤 추억을 만들 것인가.

한국 축구는 어떤 역사를 남길 것인가.


나의 아름다운 밤을 위하여, 우리의 응원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승리를 위하여, 건배!


(2023.9.3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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