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침의 역사, 먹거리의 언어

― 한국인은 무엇으로 세상을 견뎌왔는가

외침의 역사, 먹거리의 언어


― 한국인은 무엇으로 세상을 견뎌왔는가


우리 역사를 두고 흔히 ‘외침의 역사’라 말한다.

이는 감정적 수사가 아니라, 한반도의 지정학이 만들어낸 현실이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땅은 크고 작은 침략을 반복해서 겪어왔다.

학자들마다 집계 방식은 다르지만, 외침이 일상처럼 이어졌다는 사실 자체에는 이견이 없다.


외침이 닥치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삶의 기반이다.

그중에서도 먹을거리다.

전쟁은 곧 식량의 소멸이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숨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땅속에 묻고, 항아리에 담고, 시간을 견뎠다.

이 과정에서 발효 음식이 발달했다.


발효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불과 전기가 없던 시절, 음식은 쉽게 상했고

외침과 흉년이 반복되던 환경에서는

장기 저장이 곧 생존을 뜻했다.

소금과 시간, 미생물에 의지해

썩지 않게,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

김치와 장, 젓갈이다.


발효는 단순한 보존 기술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야 먹을 수 있고,

기다릴 줄 알아야 완성되는 음식이었다.

이는 조급함보다 인내를 배우는 식문화였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시간과 타협하는 삶의 태도였다.


이 발효 음식과 나란히 발달한 것이

깻잎과 상추 같은 생채소를 즐겨 먹는 식습관이다.

우리는 생채소를 그대로 먹거나,

발효된 음식과 함께 싸서 먹는다.

이른바 ‘쌈’이라 불리는 이 식사법은 우연이 아니다.

숙성된 음식과 살아 있는 채소를 함께 먹음으로써

몸이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춘 것이다.


김치와 장, 젓갈에

깻잎과 상추가 곁들여지는 식탁은

과한 맛을 누르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견딤을 가능하게 하는 실용의 지혜였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선택지는 단순했다.

살기 위해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었다.

바다의 미역·다시마·김·해파리,

들판의 냉이·달래·씀바귀·고사리.


우리는 그것을 잡초라 부르지 않았다.

나물이라 불렀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대상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는 뜻이다.


한국의 나물 문화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전해 내려오는 나물의 종류만 해도 200종이 넘는다.

이는 풍요의 결과가 아니라,

궁핍이 만들어낸 다양성이다.


이러한 삶의 기억은 언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생했다는 말 대신 “애 먹었다”고 하고,

실패를 “말아 먹었다”고 한다.


욕도 먹고, 나이도 먹고, 마음도 먹는다.

축구에서는 골을 먹는다.

상대가 못마땅하면 “밥맛”이라 하고,

상태가 나쁘면 “맛이 갔다”고 말한다.


‘먹다’라는 말 하나에

버티고, 넘기고, 견뎌온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여기서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한국인은 무엇이든 먹어왔다.

그리고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섭취가 아니다.

소화한다는 뜻이다.


소화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겨낸다는 뜻이다.


외침과 결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힘,

발효와 생채소가 함께 놓인 식탁,

그리고 ‘먹다’로 확장된 언어는

하나의 결로 이어진다.


역사와 음식과 언어는

결국 한 상 위에서 만난다.

그 상은 풍요로움을 뽐내는 식탁이 아니라,

균형으로 삶을 버텨온 식탁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도 좋다.

그들 또한, 우리가 견뎌온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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