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일대 일
(1년 전)
한강 둔치 주차장. 밤 아홉 시.
태식의 차에 한 중년 여자가 타고 있었다. 태식의 사업 파트너 영숙이었다.
“이번 일만 잘되면 탄탄대로야. 마지막까지 잘 부탁해.”
태식은 비장하게 영숙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호호. 우리 사이가 비즈니스만 하는 사이는 아니잖아요? 나도 부탁 하나 할까요?”
영숙은 태식에게 가까이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가슴을 돌리자 진한 향수 냄새가 코를 타고 들어왔다.
“무슨 부탁이든지 말해 봐. 다 들어줄게.”
“무슨 남자가 무드가 없어요? 일단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어봐요.”
태식은 영숙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영숙의 입술이 닿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태식의 입술을 벌리고 혀가 들어왔다. 태식은 영숙을 안으며 그녀가 원하는 부탁을 들어주었다. 영숙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둘이 엉켜 불타오르기 직전 강한 빛이 차창으로 들어왔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들을 향한 불빛에 둘은 얼른 떨어져서 손바닥으로 불빛을 가리며 밖을 봤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됩니다. 조심하세요.”
순찰 차량이었다. 태식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이. 좋았는데. 제대로 느끼려고 했는데. 그냥 호텔로 가자니까 이게 뭐예요?”
영숙은 태식에게 투덜거렸다.
“아니. 오늘은 안된다고 했잖아. 제발 좀 봐줘라.”
사실 태식은 성병 치료 중이었다. 영숙의 한껏 달아오른 육체를 보며 태식은 침을 꿀꺽 삼켰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기랄. 그때 접대만 하고 나는 빠질걸. 괜히 덩달아 2차 가는 바람에 걸렸잖아.’
태식은 영숙을 진정시켰다.
“너무 빠른 것도 재미없잖아? 연애하는 맛을 제대로 느껴보자고.”
“우리가 20대도 아니고, 기회 있을 때 못하면 아닌 거죠. 줘도 못 먹어요?”
영숙은 삐져서 내리려고 했다. 태식은 여차하면 사업에도 지장이 있을 거 같아서 다시 영숙을 안았다. 그때 태식의 차로 걸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나리였다.
‘어. 이차 번호는 수정이 남편 태식 씨 차 번혼데! 둘이 같이 나왔나? 호호 부부가 밤 데이트라?’
나리는 태식 부부가 밤 데이트 나온 줄 알고 놀라주려고 살금살금 차로 다가갔다.
‘악. 태식 씨는 맞는데. 수정이가 아니네. 태식 씨가 바람을….’
나리는 태식의 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계속 살펴보기로 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둘은 차에서 내렸다. 태식은 좀 떨어진 곳에 세워둔 영숙의 차까지 바래다주었다. 둘은 가볍게 다시 한번 포옹하고 키스를 한 후 영숙이 먼저 출발했다.
태식이 자신의 차로 걸어왔다. 나리는 수정에게 전화할까 하고 망설이다가 태식에게 따져 묻기로 했다. 수정이가 태식을 만나서 결혼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를 나리가 같이했기에 나리도 충격이 컸다.
“태식 씨.”
나리가 태식의 차로 다가와 차 문을 열려는 순간에 소리쳤다.
“앗. 나리 씨가 웬일이세요? 이 시간에.”
태식은 당황하며 차 문을 다시 닫으며 말했다.
“태식 씨. 정말 이러시면 안 되죠. 수정이가 태식 씨한테 얼마나 잘하는데. 이럴 수가 있어요?”
나리는 마치 자기가 수정이인 양 흥분하며 말했다.
“나리 씨. 사실은 그게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다 봤어요. 둘이 껴안고 키스하고. 그런데 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저한테도 해명할 기회는 주셔야죠. 제가 다 설명할게요. 제발 수정이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태식은 불쌍한 표정으로 간절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그 해명이란 게 뭔지 들어보죠.”
나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심판자의 심정으로 대답했다. 태식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나리의 눈을 보며 말했다.
“혼자 오신 거예요?”
“네. 속상한 일이 있어서 혼자 바람 쐬러 왔어요.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일단, 차에 타세요. 제가 모두 말씀드릴게요.”
“알았어요.”
나리는 태식의 옆자리에 탔다. 늘 수정의 자리였다. 태식의 차를 얻어 탈 때면 뒷좌석에서 수정이와 태식의 대화를 엿들으며 질투가 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수정의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다. 그것도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대가로.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바람은 절대 아닙니다. 사업상 제가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 도움이 없으면 몹시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지내게 된 겁니다. 키스한 건 오늘이 처음이고요.”
태식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리는 ‘휴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면 이해할 수 있어요.”
태식은 눈이 동그래졌다. 목격자가 지원군이 된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나리 씨. 수정이가 나리 씨 반만 닮았으면 좋겠네요.”
“수정이가 이해심이 많으면서도 이런 부분에는 쿨하지 못한 게 있기는 해요. 그래도 조심하셨어야죠.”
태식은 나리의 말에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나리 씨.”
“은혜까지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공짜도 아닙니다. 제가 속상한 일 있을 때 술 한잔 사주시면 돼요. 오늘은 집까지 태워주시면 되고요. 제가 차를 안 가지고 왔거든요.”
“아. 네. 당연히 그래야죠. 출발하겠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변했다. 심문과 협박의 분위기에서 용서와 조금은 달달한 분위기로.
며칠 후.
태식의 전화벨이 울렸다. ‘김나리 수정 친구’라고 떴다.
“네. 나리 씨. 어쩐 일이세요?”
“태식 씨. 지난번 약속하신 거 오늘 사용해도 될까요?”
오늘은 특별한 약속이 없어서 일찍 집에 가려고 했었다. 수정이가 집에서 막걸리에 파전을 준비한다고 했었다.
“아. 네. 그럼요. 없어도 만들어서 내야죠. 나리 씨가 만나자는데.”
“네. 그럼. 여의도에서 봬요. 장소는 제가 카톡으로 알려드릴게요.”
태식은 수정이에게 전화했다.
“여보. 오늘 갑자기 거래처 대표님을 만나기로 했어. 오늘 늦어질 거 같아. 미안해 막걸리는 다음에 마시자.”
태식은 수정이의 “할 수 없지. 알았어요. 술 많이 마시지 말아요.”라는 말에 미안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그래도 나리의 만나자는 말을 무시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날 둘은 술을 마셨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리는 수정이가 남자 친구라며 소개해 줄 때부터 태식을 좋아했었다고 고백했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서 섹스할 때 가끔 태식을 떠올리곤 했다고까지 말했다.
“지금 소원이 하나 있어요. 꼭 들어주셔야 해요.”
나리는 술에 취했지만 정확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네. 들어드릴게요.”
“오늘 저를 안아주세요. 25년 전 태식 씨를 처음 본 순간 느꼈던 그 감정대로….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느끼고 싶어요.”
둘은 호텔로 갔다. 나리는 태식에 대한 욕망을 채웠다. 태식은 목격자를 지원자로 바꿨다. 그렇게 둘은 한 달에 한 번 무조건 관계를 맺는 것으로 약속했다. 그러다가 나리가 이혼하겠다고 하면서 태식의 여자로 살고 싶다고 고백했다. 태식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둘은 이뤄질 수 없는 관계라며 대신 명품 가방을 선물했고 그날이 마지막이라고 말했었다.
나리는 이판사판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수정을 만나서 명품 가방을 자랑했다. 수정이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직감이 들자 그 사실을 태식에게 알리면 이혼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현실. 수정의 집)
태식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정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네. 당신도 참 멍청해. 나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차라리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지금껏 술 사주고 섹스파트너 해주고 명품 가방까지 사줬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긴 해. 내가 멍청했지.”
“아니야. 당신은 나리랑 즐긴 거야. 그러니 나한테 말을 안 한 거지.”
태식은 수정의 말에 더 변명할 수 없었다. 사실이 그랬다. 태식은 수정의 친구라는 수식어가 붙는 나리와 만나면서 묘한 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잘못한 건 맞아. 그런데 당신도 마찬가지야. 제주도에서 딴 놈이랑 잤잖아?”
타락 부부.
둘의 대화는 솔직함을 넘어섰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앞뒤 안 재고 막던지는 말이었다.
상처 주고 상처받고 할 것도 없었다.
궁금한 걸 모두 알고 싶었고 그걸 안 이후에는 다시 안 볼 걸 생각해서였다.
감추려고 변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차라리 후련했다.
돌이켜 보면 결혼생활 25년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결정적으로 아이들이 떠난 빈 둥지에서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았다.
둘은 진실을 말할 용기도 없었고, 완벽하게 서로를 속일 배짱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서로를 잃어버릴 자신도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이 지금 공통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건 쌍방과실이야.’
태식과 수정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이혼 아니면 졸혼. 두 딸이 아직 결혼하지 않아서 마음에 걸렸다.
무거운 침묵이 다시 이어졌다. 입술을 꾹 다물고 식탁만 쳐다보던 태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솔직히 당신에게 분노가 치밀었었는데 당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변명이라기에는 유치하지만, 당신 말대로 외도를 하고 나서 집에 오면 강제로 관계를 한 게 맞아. 내 자리를 다시 찾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어리석은 본능이었어.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생각이기도 했고.”
태식의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에 수정은 바로 대응하지 않고 더 들어보기로 했다. 수정이 별다른 대답 없이 들어주자 태식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어. 어머니가 알게 되어 그만두라고 말씀하셨는데 잘못을 빌기는커녕 오히려 때리셨지. 나는 숨어서 어머니가 맞는 장면을 봤어. 아버지가 너무 미웠어. 그때 다짐했어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런데 지금 내가 아버지가 한 행동을 그대로 하고 있지 뭐야. 그래서 ‘난 아버지와 달라. 다르다고’를 수없이 되뇌었어. 당신에게 정말 미안해. 사실 정신과 치료도 받았었어. 당신한테는 말 안 했지만. 조금 일찍 이런 대화를 했다면 당신이 덜 힘들었을 텐데.”
수정은 태식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 수없이 쏟아냈던 저주와 분노가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모두 들어줄게. 내가 받은 상처보다 당신이 겪은 상처가 몇백 배는 더 크게 느껴지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정말 미안해. 이 말로 당신의 상처가 아물지는 않겠지만….”
수정도 한편으로 속에 있던 증오와 분노를 방출하고 나니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뭘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이 진심으로 사과하는 거라면 일단 받아는 줄게. 우리 관계는 다시 생각해보자. 이혼을 하던, 졸혼을 하던.”
“그래. 사과받아줘서 고마워. 당신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내가 집을 나가서 생활할게. 정리되면 알려줘.”
수정은 태식의 말에 지난 25년간의 결혼생활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마지막에 떠오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명훈이었다.
“내가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할게.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정리하고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