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졸혼의 법칙

현명한 선택, 졸혼

by 작가 조바르

토요일 아침.

태식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서재 의자에서 앉은 채로 잠이 들었었다. 숙취도 있었지만, 새벽녘에서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굳어버린 허리와 무릎에 통증이 밀려왔다.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어지러움과 허전함이 가슴에 구멍을 뚫었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다는 게 실감이 났다. 잠시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다가 수정의 인기척을 듣고 다시 일어났다.

수정은 여느 때처럼 주방에 있었다.

그런 수정을 뒤에서 바라보던 태식은 늘 하던 대로 백허그를 하려다가 멈췄다.

“흠. 흠.”


헛기침을 하고 수정에게 다가갔다.


“일어났네요. 씻고 와요. 아침 차려줄 테니.”


수정은 변함없는 목소리였다. 단지 바뀐 것은 태식을 쳐다보지 않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어. 알았어.”


태식이 씻고 나와서 식탁에 앉았다.

북엇국에 김치, 오징어와 청양고추가 들어간 파전, 고춧가루 발갛게 들어간 두부조림, 양념장을 뿌린 고등어구이, 참기름을 발라 직접 구운 김, 마지막으로 돌솥 잡곡밥이 차려져 있었다.


“식기 전에 먹어. 내가 차려주는 마지막 밥이니까.”


수정의 말에 태식은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숟가락을 들고 북엇국을 한술 떴다가 내려놓았다. 어젯밤 대화가 꿈이었으면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태식의 모습을 보는 수정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수정은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태식은 반찬 하나하나에 웃고 울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결혼 초부터 기선 제압 안 하면 평생 잡혀서 산다고 선배들이 해줬던 말을 어리석게도 철저하게 실행했던 그였다.

김치는 무조건 집에서 담가야 먹는다고 했었다. 파전을 구울 때는 반드시 오징어와 청양고추를 넣으라고 했다. 수정은 매운 청양고추 때문에 오징어와 파만 골라서 먹었다. 두부조림도 고춧가루를 벌겋게 넣어야 했고 고등어구이도 파와 마늘을 다진 양념장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김은 반드시 집에서 참기름을 발라서 구워야 했다. 한가지 타협을 본 것은 돌솥밥이었다. 신혼 초에 태식이 개인용 돌솥을 사 왔을 때 수정은 어이가 없었다. 무게도 무거울 뿐 아니라 멀쩡한 전기밥솥을 두고 돌솥이라니. 태식은 매일 집에서 먹는 밥은 돌솥으로 하라고 했다. 수정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에 태식은 생활비를 반으로 줄이는 야비한 짓을 했다. 수정은 어쩔 수 없이 한 달에 한 번, 그리고 특별한 날(생일, 양가 부모님 오신 날, 명절)에만 하기로 타협을 본 것이다.

지금 태식의 앞에 있는 돌솥밥은 아무런 날도 아닌 특별한 날이었다. 태식은 신혼 초 선배들의 조언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실행했던 게 후회되었다.

‘넌 완전 바보야. 선배 자신들도 하지 못하면서 나한테 한 말을 그대로 믿고 한 바보 멍청이.’


태식은 수정이 차려준 마지막 식사를 맛있게 먹어주는 게 수정을 위하는 거로 생각했다. 일부러 쩝쩝 소리까지 내면서 먹었다.

‘하, 어쩔 수 없는 인간이네. 먹을 거 앞에서는 아무 생각도 못 하는 단세포 인간. 저런 인간을 사랑하고 믿으며 살았던 내가 바보지.’


25년을 살았어도 속에 있는 진심을 모르는 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그래서 표현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둘은 서로 알아주기를,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태식이 식사를 마칠 즈음 수정은 물을 따라주었다. 태식이 물을 마시고 물컵을 내려놓자 수정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졸혼 합의서>

태식은 제목을 보며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합의문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1. 김태식과 백수정은 ‘22.8.25일부로 졸혼에 합의한다.

2. 졸혼하며 다음의 여덟 가지 사항을 반드시 이행한다.

가. 재산은 50:50으로 나눈다.

나. 김태식은 집을 나가서 별도의 주거지에서 생활한다.

다. 현재 주거하는 집은 아이들과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므로 백수정이 계속 사용한다.

김태식은 가족 모임 시 집에 올 수는 있으나 숙박을 할 수는 없다.

라. 별거 생활 간 서로의 개인적 활동에 간섭하지 않는다. 물론 법적 책임도 묻지 않는다.

마. 졸혼 유지 기간은 5년으로 한다.

바. 졸혼 기간 내 또는 이혼 후 아이들이 결혼 시 반드시 두 사람이 참석해서 축복한다.

사. 졸혼 기간이 끝나는 날(’27.8.24)에 둘은 합의이혼을 한다.

합의이혼 서류는 미리 작성해서 상호 서명하고 각각 1부씩 보관한다.

아. 졸혼 합의서의 법적 구속력을 위해 공증을 한다.

3. 위 내용을 합의하고 이행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김태식

백수정(수정의 서명란에는 이미 사인이 되어있었다.)

공증인


태식은 수정의 치밀한 준비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5년의 졸혼 유지 기간은 아이들을 위해서 필요한 기간이라고 생각했다. 두 딸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활동을 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당신 준비 많이 했네. 이런 것까지 작성한 걸 보면.”

태식은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갑자기 준비한 게 아니에요. 당신과 헤어질 결심을 수십 번도 넘게 했었어요. 죽고 싶은 순간도 많았고. 이 정도면 당신도 불만이 없을 거예요.”


수정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태식은 알았다며 이름 옆에 사인했다. 두 장을 만들어서 각각 1장씩 가졌으며 이혼신고서도 미리 작성했다.

태식은 여행 가방에 옷가지를 쌌다. 오피스텔이 구해질 때까지 당분간은 모텔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집에 있는 물건 중에 태식과 수정 단둘이 찍은 사진은 모두 없앴다. 아이들과 같이 찍은 사진은 남겨두기로 했다.

태식은 집을 나서며 수정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당신과 결혼해서 나 혼자만 행복했어. 당신이 상처받고 행복하게 살지 못하게 만든 거 다 내 책임이야. 정말 미안해. 이제부터는 행복하게 살아.”


태식은 수정의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집을 나갔다.


태식이 떠난 집.

수정은 소파에 앉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조금의 양심만 있어도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 태식의 뒷모습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수정은 태식이 나간 현관문을 바라봤다.

저 문을 열고 술에 취해서 ‘꺼억’ 거리며 원치 않는 섹스로 강간당하는 느낌을 주었던 태식. 그 인간을 이제 보지 않고 살게 되었는데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할까.

수정은 지금의 상황이 자신의 잘못이 전혀 없다고, 자신만이 순수한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그래. 모든 게 끝났어. 용기가 없어서 깨지 못한 틀을 이제야 깬 거야. 남은 인생은 내가 행복한 인생을 살자.’


수정은 태식이 서명해준 졸혼 합의서와 5년 후 제출할 이혼신고서를 들고 있는 자신을 보며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지옥 같은 결혼생활에 눈물샘이 말라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현실을 자각하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3일째 되던 날 아침에 둘째 딸 선영이가 전화했다.

“엄마. 뭐해?”

“뭐하긴 그냥 있지.”

“내가 그냥 있지 말라고 했잖아. 사랑스러운 딸 생각하고 있다고 하라고 했잖아. 헤헤.”

“뭘 강요하는 건 어째 너 아빠하고 똑같냐?”

“엄마 아빠 딸이니까 닮는 건 당연하지.”


선영이가 엄마 아빠를 닮는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 딸이 내 인생을 닮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선영아. 좋은 거만 닮아야지. 넌 절대 엄마처럼 살지 마라.”

“엄마가 어때서? 엄마처럼 행복한 여자가 얼마나 있을까? 헤헤.”

“그래 됐고. 무슨 일이니?”

“아빠가 내 전화를 안 받아. 무슨 일 있어? 문자 보내도 바쁘다는 말만 하고.”

“아. 어. 그게….”

“엄마. 아빠랑 싸웠어?”


수정은 딸의 말에 울컥하며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니야. 언제 집에 오니? 이번 주 토요일에는 올 거지?”

“응. 갈게. 지난주에 못 가서 그런지 보고 싶다.”

“그래. 너 좋아하는 거 해놓을게.”

“알았어. 엄마. 아빠한테 전화 좀 받으라고 말해줘. 또 안 받으면 안 놀아준다고 해. 헤헤.”

“알았어. 끊는다.”


수정은 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상처받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하지? 아니야 엄마의 선택을 존중해줄 거야.’


수정은 졸혼의 현실적인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반면에 태식이 없는 가벼움도 느꼈다.


졸혼 서약 1주일 후 토요일 아침.


딩동

디리리릭.

삐삐삐삐


태식이 현관문을 열려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바꿨구나!’


딩동 딩동

벨을 눌렀다.

철컥


“비밀번호 바꿨어?”


태식은 현관을 들어서며 수정에게 물었다.


“응. 바꿨어요. 이제 여기는 내 생활공간이니까 당신이 알면 안 되지.”

“너무 그렇게 쌀쌀맞게 굴지 마라. 나도 다 아니까.”

태식은 제집처럼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낯설었다.

태식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서재로 사용하던 공간 한쪽 끝에 뒤집어서 세워놓은 가족사진. 그 외에는 모두 새로운 물건이거나 추억 어린 물건들이 사라진 빈 곳이었다.

“선영이는 몇 시에 온 데?”


태식은 서먹서먹한 자세로 수정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곧 도착할 거야. 지하철 내렸다고 문자 왔어요.”

“당신, 선영이한테 어떻게 설명할 거야? 내가 말할까?”

“아니. 내가 설명할게. 당신은 그냥 부연 설명만 해요.”

“알았어.”


딩동

디리리릭.

삐삐삐삐.

딩동 딩동.

쾅쾅쾅


“엄마. 나야. 선영이. 문 열어 줘. 비밀번호 바꿨어?”


태식이 먼저 현관으로 갔다.


철컥


“어. 아빠. 엄마는? 비번 바꿨어?”

“어. 그래. 엄마는 거실에 있다.”


선영은 신발을 벗기가 무섭게 달려가 수정에게 안겼다.


“엄마. 보고 싶었어.”


태식이 두 모녀를 보며 질투가 나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빠는 안 보고 싶었냐? 이거 섭섭한데. 네 등록금 낸다고 등골이 휘는데 말야. 허허.”


그제야 선영은 태식에게 안기며 아빠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수정은 아빠와 딸이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설명할 건지 더 막막해졌다.


“배고프지? 밥부터 먹고 이야기하자. 옷 갈아입고 나와.”

“알았어. 엄마.”


선영이 방으로 들어간 사이 태식은 수정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은 설명할 자신이 없다는 듯이 양손을 올렸다. 수정은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나?’


딸과 함께 앉은 식탁. 오랜만이었다. 큰딸만 왔으면 완전체인데. 수정은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태식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연신 딸을 쳐다봤다가 수정을 쳐다봤다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서 식탁만 쳐다봤다가를 반복했다. 수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영아. 밥 먹고 아빠 엄마가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뭐야. 왜 이렇게 심각해? 꼭 이혼 발표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뜨끔했다. 놀란 표정이 정지상태로 굳어졌다.

“얘는 별소리 다 한다. 이혼이라니.”


수정은 얼른 아니라고 말했다. 순간 ‘아차’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말해버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졸혼한다는 거지 이혼한다는 건 아니니까.

선영과 태식이 소파에 앉았다. 수정은 커피와 포도를 가져갔다.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기운이 흘렀다. 선영이는 아빠 엄마의 행동에 뭔가 심상찮은 점을 느꼈다.

“엄마. 말해 봐. 중대 발표라도 할 것 같은데? 이혼은 아니라고 했고. 뭐 아빠 사업이 부도나서 집을 팔아야 하나? 아 뭔데 말해 그냥.”


선영은 신경질적으로 상체를 흔들며 재촉했다.


“어. 그래. 사실은 엄마 아빠 졸혼하기로 했어. 졸혼이 무슨 말인지 알지?”

“졸혼? 왜?”


이번에는 태식이 말을 거들며 끼어들었다.


“엄마가 고생을 많이 했잖니. 아빠가 잘해주지도 못했고. 그래서 엄마한테 자유를 주기로 했어. 이건 순전히 아빠가 잘못했기 때문이야. 딱 5년만 떨어져서 생활해보고 5년 후에도 생각이 변함없으면 그때 이혼할 거야. 지금 당장 이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아. 그래서 아빠가 내 전화를 안 받았구나? 둘이 알아서 해. 난 상관없어. 사실 아빠가 엄마한테 무심하기는 했어. 나도 가끔 아빠 같은 남자 만날까 무섭더라고. 어쨌든 난 신경 쓰지 마. 두 분 결정 존중할게.”

딸의 말에 수정은 울음을 쏟고 말았다.


“미안해. 선영아. 엄마도 많이 참았는데.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가 없었어.”

“아니야 엄마. 울지 마. 괜찮아. 내가 괜찮다는데 왜 울어.”

두 모녀가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을 보니 태식은 후회가 막심했다. 따라 울지는 못하고 속에서 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꺼억 꺼억 흐느끼기만 했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결국, 딸에게도 상처를 주고 말았어.’

“엄마, 아빠. 난 괜찮아. 사실 엄마가 제주도 갔을 때부터 대충 눈치는 챘었어. 뭐,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 신중하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일 거라고 봐. 그런다고 내가 엄마 아빠 딸 아닌 게 아니잖아?”


태식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 미안하다. 미안하다 딸.”

“괜찮테도. 그럼 아빠는 지금 어디서 살아?”

“응. 오피스텔 하나 구했어. 복층인데 짐 정리되면 부를게.”

“호호. 아빠가 짐 정리를 한다고? 한 번도 안 해봤잖아. 차라리 내가 가서 해주는 게 낫겠다. 언제든지 말해 내가 가서 해줄게. 아, 그리고 언니한테는 내가 알려줄게. 괜히 어렵게 말하지 말고 그냥 내가 설명해줄 테니까 두 분은 그냥 계셔.”


선영은 엄마 편이었다가 아빠 편이었다가 왔다 갔다를 잘했다. 큰딸은 아빠를 닮아서 말이 없는데 둘째는 무척 밝았다. 수정은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어려운 숙제 하나를 끝낸 기분이었다. 드디어 공식적으로 졸혼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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