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지기 친구에게 남편을 줬다.
수정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틱
“어. 어. 수, 수정아. 웬일이야?”
나리는 지난번 폭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서인지 아직 수정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얼떨결에 놀라서 말까지 더듬거렸다.
“친구한테 전화하는 데 웬일이긴? 너답지 않게.”
수정은 나리에게 통쾌한 복수의 선물을 주기로 했다. 목소리에 비장함이 묻어 있었다.
“지난번에 만났던 커피숍 알지? 거기서 4시에 만나자. 너에게 줄 선물이 있어.”
“선물? 나한테? 네가? 왜?”
“계집애, 네가 좋아하는 선물 주려는 거니까 시간 맞춰서 와.”
수정은 속으로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아닌 척했다. 통쾌한 복수를 위해 이 정도 분노쯤은 충분히 삭일 수 있었다.
“그래. 알았다. 이따 봐.”
나리는 뭔지 모를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선물이라? 무슨 선물을 준다는 거지?’
수정이가 먼저 도착해있었다. 수정은 의자 위에 나리에게 줄 종이 가방 하나를 올려놓았다. 나리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평상시처럼 손을 들어 위치를 알려줬다. 나리는 마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이 수정이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나리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두 번은 말 안 한다.”
수정의 얼굴에는 단호한 모습까지 보였다.
“뭔데. 이 호들갑이야? 말해봐.”
“나리 네가 탐내는 쓰레기, 그냥 네가 가져. 너한테 줄게.”
수정의 갑작스러운 발표에 나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그토록 떼어놓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부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이 이혼시키려고 온갖 쇼를 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쉽게 자신에게 준다니!’
“무슨 소리야? 쓰레기는 뭐고, 뭘 가지란 거야?”
나리는 직감적으로 수정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다시 확인차 모른 척 되물었다.
“너. 내 남편하고 바람피우는 거 다 알아. 내 남편 김태식을 상간녀 김나리에게 주겠다고.”
수정은 의자 위에 놓아두었던 백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 속에 네가 좋아죽는 김태식 속옷이랑, 오피스텔 주소, 비밀번호까지 다 적어뒀어. 이제 네꺼 해라. 넌 원하는 거 얻어서 좋고, 난 쓰레기 치워서 좋아. 이걸로 우리 사이도 정리하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야. 네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잘 살아라. 간다.”
수정은 나리의 따귀라도 후려치고 싶었지만 쿨하게 자리를 뜨는 게 더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리는 수정의 행동에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수정이가 커피숍을 나갈 때까지 쳐다 볼 수도 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이혼 하지는 않았지만 졸혼 서약을 한 상태였다. 수정은 집으로 가는 길에 태식과의 첫 만남부터 결혼,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생각했다. 남편으로서 태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수정은 냉철하게 하나하나 따져봤다.
‘초반에는 50점, 중반에는 20점, 지금은 –50점. 이것도 후하게 준 점수야.’
최악의 남자였다.
폭력적인 남자, 술과 일에 중독된 남자, 결정적으로 바람피우는 남자였다. 다른 여자를 만나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한 뒤에 집에 와서 폭력성을 드러내며 자신을 강간하는 남자. 수정은 치를 떨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와는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사람.
연애할 때는 태식의 폭력성과 중독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가지 바람피우는 것은 알고 있었다. 대학 친구 혜선이가 태식의 양다리 사실을 알려줬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다음에야 인정했다. 하지만 수정은 상대녀보다 자신이 더 매력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상태로 헤어지면 자신이 태식을 떠나는 게 아니라 태식으로부터 버림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수정이 내린 최선의 선택은 태식이 다른 여자를 정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원하는 대로 되었지만 수정은 엄마의 경고를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연애할 때 바람 핀 놈은 결혼해서도 바람피운다. 개 버릇 남 못 준다.’
수정은 결혼 전에 엄마와 단둘이 이야기를 하면서 태식의 양다리 정리사건에 대해 말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엄마는 한숨을 쉬며 수정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궁금하지? 네가 결혼하니까 말해줘야겠구나.”
수정은 지금껏 아버지 이야기는 금기사항으로 알고 초등학교 1학년 때 딱 한 번 물어보고 더 물어보지 않았었다.
“아버지 이야기?, 사실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는 했어. 엄마 때문에 안 물어보기는 했지만.”
“네 아버지는 천하의 잡놈이었어. 술에, 노름에, 여자에. 나쁜 짓은 골라가며 다 했지.”
엄마의 눈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수정은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천하의 잡놈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한숨을 크게 쉬고 나서 말을 이어갔다.
“엄마는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어. 네 외가는 동네, 아니 읍내까지 다 합해도 제일가는 부자였지. 아들이 없어서 네 아버지를 데릴사위처럼 들여서 살았어. 처음에는 네 아버지가 참 잘했단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수정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며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라고 물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본색을 드러냈어. 사업한다고 재산을 하나씩 팔아치우더니 급기야 그 많던 재산을 술과 노름, 계집질하는데 다 날려버렸지. 네 외할머니는 그 충격으로 돌아가셨어. 그때는 초상 치르러 오지도 않더라. 읍내 사는 유부녀하고 바람이 났거든. 며칠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단다. 그 사이 외할머니가 홧병으로 돌아가신거야.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은 ‘미안하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어. 김서방이랑 이혼해라.’였어.”
수정은 희미하게 떠오르는 아버지 모습을 기억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 그래서 어떻게 됐어?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는 어디에 있었어? 연락은 된 거야?”
“당연히 안되었지. 사람들을 수소문해서 찾아달라고 했지. 그런데 다음날 경찰이 찾아왔어.”
“경찰이 집으로? 왜?”
“벌채하는 산막에서 불이 났는데 그 속에 사람 둘이 타 죽었다는 거야. 불을 낸 사람이 경찰에 자수를 했고.”
“설마 아버지가 불에 타죽었다고?”
“경찰에 자수를 한 사람은 산막에서 네 아버지와 바람을 피우던 여자의 남편이었어. 마누라가 바람이 난 걸 알고 미행을 한거지. 그런데 둘이 아무도 없는 산막에 들어가더니 그 짓을 하더라는 거야. 그래서 홧김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못질을 하고 석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고 했어. 결국, 까맣게 탄 두 시신만 남았지. 네 외할머니 상여가 나가기도 전에 네 아빠 시신을 수습하고 바로 화장해서 강물에 뿌렸어. 다음 날 외할머니를 할아버지 옆에 묻어드리고 바로 동네를 떠났지. 나름 꽤 신망을 받던 부잣집이었는데 네 아빠 때문에 풍비박산이 난 거야.”
수정은 자라면서 막연하게 아빠가 우리 모녀를 버렸구나 라고만 생각했었다. 한 장이라도 있을법한 가족사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식에게 더욱 집착했는지 모른다. 버려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큰 나머지 태식과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한 것이다.
수정은 자신의 삶이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인생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결정하고 나를 위한 삶을 살 거야. 태식에게도 집착하지 말고. 그래 잘했어. 쓰레기는 쓰레기한테 어울리는 법이야. 잘 줘버렸어. 나리야, 너도 곧 쓰레기통에서 허우적거릴 거야. 네가 나를 배신한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