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들의 전쟁
딩동
“누구세요?”
“김태식 씨 집이죠?”
순간 907호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김태식 씨 집이죠.’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인터폰으로 현관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긴장하고 있는 907호. 5살 아이의 젊은 엄마. 그녀는 태식의 전비서였던 희주였다.
아무도 없는 밤. 태식의 지시로 야근을 하던 희주는 28살의 순진한 아가씨였다. 그날 밤 태식은 희주를 성폭행했다. 그리고 재수 없게도 아이까지 임신이 되어버렸다. 어머니 병원비로 힘들어했던 희주에게 태식은 스스로 물주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엎질러진 물. 하얀 눈처럼 맑았던 희주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애인 유권의 끊임없는 설득에도 돈 때문에 모든 걸 포기했다.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삼0 보험에서 나왔어요. 김태식 씨가 아내분 앞으로 보험을 들었는데 직접 서명을 받아야 해서요.”
나리는 보험회사 약관을 인터폰 카메라에 들이밀며 보여주었다.
“잠깐만요.”
희주는 태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전화 좀 받아라. 급할 땐 늘 이런 식이야.’ 희주의 손은 가볍게 떨렸다. 밖에 있는 여자에게 불길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톡으로 문자를 남겼다. ‘지금 보험회사라며 어떤 여자가 집으로 찾아왔어. 내 앞으로 보험 든 거 있어?’
답이 없었다.
딩동딩동
“나도 바쁜 사람이에요. 안 열어주시면 갑니다. 사인 한 번 받기 힘드네요.”
희주는 다시 한번 태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만 가고 받지 않았다.
열어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네, 들어오세요.”
띠리리릭
현관문이 열렸다.
나리는 문을 힘껏 열어젖히며 신발을 신은 채 오피스텔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 앞에 있던 희주는 나리의 거침없는 돌격에 벌러덩 넘어졌다. 깜짝 놀랄 틈도 없이 나리는 오피스텔 안에 있는 물건들을 마구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TV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쳤고, 주방 수납장에 있던 접시는 모조리 바닥에 던져 깨뜨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자 태식이 모자와 같이 찍은 사진이 보였다. 큰 액자에 담겨 침대 맞은편에 걸려 있었다. 분노 게이지가 최대로 올랐다. 마치 뚜껑 열린 주전자처럼 분노를 마구마구 발산했다. 사진 액자를 떼어내서 바닥에 던지고는 발로 밟았다. “이런 개 같은 것들. 나 몰래 이러고 살았어?” 나리는 마치 자기가 조강지처나 되는 것처럼 욕을 했다.
“이보세요. 당신 누군데 행패야?”
희주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태식이 아니었다. ‘유권 오빠’라고 뜨는 전화번호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순간, 머리카락이 뽑혀나갈 듯한 고통과 함께 가녀린 허리가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아악, 이거 놔.”
희주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나리는 머리채를 이리저리 끌며 욕설을 퍼부었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유부남을 꼬여. 네 새끼랑 너랑 오늘 죽자. 모두 죽여버릴 거야.”
희주는 그제야 여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자기 머리채를 잡은 여자는 분명 태식의 아내인 수정이 아니었다.
‘오호, 이 여자 봐라.’ 희주는 그냥 당하고 있을 상대가 아님을 보여주기로 작정했다.
“어디서 행패야? 네가 뭔데 지랄이야?”
희주는 한 손으로 나리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 나리의 머리를 잡은 상태에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이제 둘은 뒹굴며 머리채를 잡히지 않으려고 서로 할퀴고 발로 차고 난리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둘 다 지쳐 만신창이가 된 서로를 보며 머리채만 잡고 있었다.
띠띠띠띠
띠리리릭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건장한 남자가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희주야. 괜찮아?”
유권은 서로 엉켜 있는 두 여자를 보며 재빨리 나리를 희주에게서 떼어냈다.
“당신 뭔데 여기서 행패야? 죽고 싶어?”
“그래. 죽여라. 어디서 할 짓이 없어서 남의 남자를 유혹해서 애까지 낳고 살아?”
나리는 유권의 덩치에 움찔했지만 이판사판이라 생각하니 못할 말도 없었다.
“오빠, 이 여자 준후 아빠(태식) 본처도 아니야. 내가 본처를 알잖아.”
순간 나리는 아찔했다. 지금까지 본처 행세를 하며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고 행패를 부렸는데……. 그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당신 뭐야? 누구야?”
유권의 목소리가 커졌다. 금방이라도 때릴 것처럼 큰 손으로 나리의 어깨를 밀었다.
“아니. 내 남편이랑 당신 동생이랑 바람을…….”
“뭐, 내 남편? 지금 남편이라고 했어? 뭐 이런 xx가 다 있어?”
유권은 나리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나리는 불이 번쩍하며 고개가 돌려졌고 다음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유권의 손이 얼마나 큰지 나리의 얼굴 전체가 배구공처럼 옆으로 튕기면서 몸도 같이 날아갔다.
쓰러진 나리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유권이 죽일 듯이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태식이 이 새끼도 죽여버릴 거야. 너, 어디서 굴러먹다 태식이랑 붙어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디서 어설프게 본처 행세하고 지랄이야. 죽고 싶어?“
“오빠. 경찰에 신고해서 넘겨. 이런 xx는 콩밥 좀 먹어야 해. 상간녀 주제에 어디서 행패야. 난 네년이 알기도 전부터 준후 낳고 살았어. 본처랑 이혼해서 이제 같이 산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뭐 이런 쓰레기 같은 게 끼어들어?”
유권이 경찰에 신고하고 나리가 도망가지 못하게 잡고 있는 사이 희주는 태식에게 전화했다.
“어, 희주야. 지금 시간에 어쩐 일이야?”
“준후 아빠. 당신 나 말고 다른 여자 만나고 있었어?”
“아, 아니야. 내가 설명할 수 있어. 절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 이상한 xx가 집에 와서 온통 행패 부리고 마치 본처인 것처럼 행동해서 경찰 불렀는데.”
“뭐라고. 정말이야?”
“다시는 준후 얼굴 볼 생각하지마. 지금 오빠 와 있어.”
“처남까지 왔다고? 알았어. 내가 갈게. 그 여자는 그냥 보내. 내가 처리할게. ”
나리는 분했다. 태식의 말이 다 들렸다. ‘아 xx,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이제 나를 버리는 건가? 어쨌든 지금 상황은 나리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았다.
그냥 서로 첩이 첩질하는 꼴 못 보는 상황이었다. 누가 먼저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느냐가 중요했다. 그런데 상대는 젊고 아이까지 낳은 여자고 나리는 오랜 친구의 남편을 뺏은 말 그대로 불륜녀였다.
“경찰 부르셨죠?”
남자 경찰 한 명, 여자 경찰 한 명이 오피스텔로 들어왔다.
전쟁터 같은 상황을 보던 남자 경찰이 물었다.
“어느 분이 신고하셨나요?”
“제가 신고했습니다. 저 여자가 무단 침입을 했고 여기 보시는 대로 살림살이를 모두 부쉈습니다. 제 동생도 폭행했고요.”
경찰은 소파 옆에 기대어 있는 나리를 쳐다봤다. 헝클어진 머리에 초점 없는 눈빛. 모든 걸 인정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 남자분 말씀이 맞나요?”
“…….”
나리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수 없었다.
“자, 일어나세요. 파출소로 가서 이야기하시죠.”
여자 경찰이 나리를 일으켜 세웠다.
“두 분도 같이 가셔서 조사에 응해주셔야 합니다.”
(한 시간 후, 파출소)
태식은 파출소로 이동하면서 희주에게 나리를 보내주라고, 자신이 모든 걸 다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적어도 파출소에서 삼자대면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는 말이었다.
현장 상황은 태식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옷이 찢기고 머리가 헝클어진 두 여자. 씩씩거리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태식은 일단 경찰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신이 왔다고 누구에게 먼저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경찰에게 대신 ‘나 왔노라.’를 외친 거였다. 두 여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태식을 쳐다봤다. 태식은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망설였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탕수육 찍먹이냐 부먹이냐 보다 더 힘든 선택이었다. 그런 태식에게 욕설이 날아왔다.
“준후 아빠, 이게 말이 돼요? 본처하고 이혼했으면 준후하고 내 동생이랑 잘살아야지. 어디서 또 바람을 피워. 이러고도 준후 얼굴 볼 수 있겠어요?”
유권의 말투는 반말과 높임말을 섞어가며 최대한 자제를 하고 있다는 듯이 요점만 힘주어 말했다.
“처남.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희주 데리고 먼저 집에 가 있어. 여기 처리하고 금방 갈게.”
태식은 희주의 오빠에게 말을 놓았다. 희주 오빠지만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렸다.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준후랑 나랑 어떻게 살아왔는데. 당신이 이러면 안 되지. 천벌 받아.”
희주는 태식의 가슴을 치며 울먹였다.
“참 잘하고 있네요. 수정이 몰래 아이까지 낳고 딴 살림을 차렸었다니.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경찰 선생님. 마음대로 하세요. 합의 볼 생각도 없고요. 이제 아무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태식은 나리의 얼굴을 쳐다보고 다시 유권을 보며 말했다.
“처남. 제발 내가 시키는 대로 해줘. 희주 데리고 집으로 가. 여기는 내가 정리할게.”
유권은 더 이상 험한 꼴 보지 말자며 희주를 데리고 파출소를 나섰다.
“경찰 선생님. 고발 취하하고 제가 모두 정리할 테니까 여기서 모두 종결시켜 주십시오.”
“그건 안됩니다. 일단 접수가 됐으니까 고발인이 고소를 취하하기 전에는 안됩니다.”
“아니, 조금 전 상황 다 보셨잖아요. 고발인이 제가 처리하는 것으로 위임을 했으니까 고소 취하하고 이 사람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럼 선생님 신분증하고 여기 서명해주세요.”
태식은 신분증을 건네주고 나리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왜 그 집에 가서 난리를 폈어. 나한테 먼저 말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지금 나한테 그런 말 할 상황이에요? 두 집 살림 하겠다는 거예요?”
“아니, 일단 진정하고 여기서 나갑시다.”
나리는 독기를 품은 눈으로 태식을 쳐다봤다.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한 태식인데…….
갑자기 수정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너도 똑같이 당하면서 살아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