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무너진 사랑탑

불륜의 마지막

by 작가 조바르

오피스텔 8층과 9층에 두 집 살림하는 남자.

태식에게 몰락을 재촉하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파출소에서 나온 태식과 나리는 일단 오피스텔로 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나를 선택하든 그 여자를 선택하든 결판을 내야죠?”

“알았어요. 물론 당신이지. 907호는 내가 어쩔 수 없이 발목 잡힌 거고, 당신은 내가 노년을 함께할 사람이야. 그러니 정말 미안해요. 내가 정리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줘요. 나 이것 말고도 정신없어요. 회사도 어렵고…….”

“회사가 어렵다니 그건 무슨 말이에요?”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대출도 점점 막혀가고.”


나리는 긴 한숨을 쉬었다.

‘아 x 발, 돈, 사랑 둘 다 거머쥐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아니겠지.’


지금 와서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907호 정리보다 회사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더 위기처럼 느껴졌다. 돈줄마저 끊겨버리면 나리는 태식에게서 희망을 볼 수 없었다.


“일단 907호 정리하고, 회사에 집중하세요. 907호 정리 못 하면 내가 다시 나설 거니깐.”

“알았어요. 지금 정리하고 올게요. 사실 그 아이도 내 아이인지 아닌지 확실하지도 않다니까.”


‘나쁜 x. 아무리 그래도 제 자식도 부정하는 x였어?’


나리는 태식의 인간성이 개차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남자를 좋아하고 친구에게 상처를 준 자신이 한심했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이대로 끝내면 자신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오피스텔도 자신의 명의로 된 게 아니다. 나리는 빨리 정리하고 오라며 태식을 밖으로 내보냈다.


907호 앞.

태식은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잠시 멈칫했다. 안에서 말하는 소리가 밖으로 들렸다. 희주의 오빠가 흥분해서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당장 그 x 와 헤어져. 위자료는 이런 오피스텔 말고 아파트를 해달라고 해. 언제까지 그 늙은 놈하고 살 거야?”

“오빠. 조금만 참아줘. 지금까지 잘 참아 줬잖아. 지난주에 아파트 보고 왔어. 곧 계약 할 거야. 내 이름으로 할 거야.”

“내가 어머니 보고 참는다.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띠띠띠띠

띠리리릭


태식이 907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 왔어.”


유권과 희주는 태식이 둘의 대화를 들었을까 봐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처남. 내가 잘못했으니까 희주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뭘 잘했다고 그래요.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거요? 당신 딸이 이렇게 살면 가만히 둘 거요?”


유권은 그동안 벼려왔던 생각을 거침없이 말했다. 금방이라도 그 큰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오빠 이러지 마. 이 사람이 잘못했다잖아. 당신도 이제 정신 차리세요. 준후 이제 유치원 돌아올 시간이에요. 준후 잠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아니 오빠가 오늘 준후 좀 데리고 가서 놀아줘.”

“알았어. 근데 준후 아빠. 경고하는데 당장 아파트로 이사시키지 않으면 그땐 처남·매부 사이도 없을 테니까 알아서 해요. 내가 분명히 밝혀두는데 지난주에 본 아파트 이번 주 중으로 계약하고 최대한 빨리 이사시켜요. 경고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 목숨도 온전치 못할 테니까 알아서 해요. 아니 당신 딸들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어디 한번 해보시든가.”

“처남.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말이 어딨어?”

“누가 처남이야 이 xx야. 너 당장 죽이고 싶은데 참는 거야.”


유권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그 강렬한 기운에 태식은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지난주에 본 아파트를 계약하려면 지금 오피스텔을 두 개를 팔고도 2억이 더 필요했다. 담보 대출을 받으면 되겠지만 지금 회사 사정으로 추가 담보 대출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2억이 더 필요했다.


다시 807호로 돌아온 태식이 한숨을 쉬었다.

907호를 아파트로 옮기지 않으면 처남한테 맞아 죽을 거 같고, 907호를 정리하지 않으면 나리가 죽자고 덤벼들 것 같았다. 태식은 둘 다 한꺼번에 해결할 묘수가 필요했다.


“907호 어떻게 되었어요? 정리했어요?”

“응. 정리했어.”

“오피스텔은 순순히 내놓겠다고 해요?”

“아니. 그건 자기와 아이 몫으로 명의이전을 해달라고 하더군.”

“진짜 그것만 받고 물러나겠데요?”

“응. 그것만 받고 새 출발 하겠다고 다시는 아이 볼 생각 말라더군.”


나리는 태식의 말에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가 무슨 꿍꿍이를 피우는 걸까?’ 이제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오피스텔을 줄 거예요?”

“회사 자금 사정이 어려워서 오피스텔을 팔고 월세로 전환하려고 했는데 이제 그도 어렵게 되었어. 여기도 어떻게 될지 몰라. 담보로 잡혀 있거든.”

“여기도 담보로 잡혀 있다고요? 난 어디서 살라고.”


나리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침착하자 침착하자를 두 번 되뇌고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도대체 당신 회사 자금 사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말해봐요. 907호 위자료 주는 거보다 회사를 살리는 게 우선이잖아요.”

“그렇지. 회사를 살리는 게 우선이지.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2억 정도만 어떻게 해줄 수 없어? 회사만 다시 잘되면 10배로 줄게.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고. 응. 제발 좀 도와줘.”


이건 뭐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꼴이 돼 버렸다.


“내가 그렇게 큰돈이 어딨어요? 이혼할 때 한 푼도 못 챙겨 나왔는데.”

“아직 정식으로 이혼 안 했잖아. 그러니 위자료 2억이라도 챙겨 나와.”

“내가 유책배우자인데 그게 가능하겠어요?”

“소송으로 간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50%는 받을 수 있어. 남편도 평생 바람 한 번도 안 피우고 당신한테 힘들게 한 적 없지는 않을 거 아냐?”

“그걸로 될까요?”

“당연히 되지. 내가 아는 변호사 소개해 줄 테니까 당장 소송하자.”

“그래요. 그럼 그렇게라도 해봐요.”

“고마워요. 역시 내가 당신을 선택하기 잘했어.”


태식은 나리에게 변호사를 붙여줬다.

소송이 시작되자 나리의 남편은 상간남 위자료 소송을 걸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물증을 제시하지 못하고 나리의 진술만 언급할 뿐이었다. 결국, 가정파탄의 책임은 나리의 남편이 일 중독으로 가정에 소홀히 했고 아내와 주기적인 성생활도 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더 주목받았다.

나리 남편은 더럽고 치사하다며 소송을 취하하고 협의 이혼으로 재산분할을 해주었다. 나리는 재산분할로 3억의 위자료를 받았다. 아파트를 처분하고 받은 50%였다.


나리는 태식의 회사에 먼저 2억을 투자조건으로 차용증서를 썼다. 그리고 태식의 계좌로 송금했다. 송금 한 날 나리는 태식과 새로운 출발을 꿈꿨다. 곧 재혼할 거며 둘만의 보금자리로 이사할 거고 혼인신고도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렜다.


태식은 회사도 매각하고 모든 돈을 가지고 베트남으로 출국했다. 나리한테는 해외 출장이라고 말하며 1주일 걸릴 거라고 했다. 1주일 사이에 모든 정리를 마치고 한국을 뜬 것이다.

나리는 태식이 전화를 받지 않자 불안해졌다. 카톡도 읽지 않았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바쁘니까 그렇겠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통화가 안 되는 건 이상해.’

나리는 태식이 해외 출장을 떠난 지 1주일이 지난날 태식의 회사로 찾아갔다. 이제 혼인신고만 하면 당당하게 회사 대표의 부인이 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대표님 혹시 연락되시나요?”

“누구세요? 대표님은 지금 안 계신대요.”

“아니 제가 대표님과 곧 결혼할 사람인데요. 출장 가신 후 연락이 되지 않아서 혹시 회사에서는 연락이 되는지 알고 싶어서요.”

“네? 해외 출장요? 대표님 지금 식사하러 가셨는데요.”

“네? 식사하러 갔다고요? 지금 한국에 있는 거예요?”


비서실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며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지금 손님이 한 분 오셨는데요. 대표님과 결혼하실 분이라고 하시면서 해외 출장 가셨지 않냐고 하시는데요?”

“아, 이전 김태식 씨 아는 분 같은데요. 설명해드려요. 그리고 김 비서, 나 결혼해서 큰아들이 다음 달이면 장가가요. 그 정도는 알아야지.”

“아, 네.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비서실 직원은 얼굴을 붉으락 거리며 나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김태식 대표님 찾아오신 거예요?”

“네. 맞아요. 김태식 대표님.”

“아, 그분은 이제 여기 안 계세요. 회사를 지금 대표님에게 넘기시고 그만두셨어요.”


나리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내 돈 2억.’ 나리는 털썩 주저앉았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나리는 한참을 멍하니 있고 난 뒤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하자. 사기죄, 혼인빙자 간음죄 모든 죄목을 들어서 고소하자. 부르르 몸이 떨렸다.

그때였다.


띠리리릭


현관문이 열렸다.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태식과 자신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태식 씨가 나를 버리지 않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벌떡 일어나서 현관으로 달려갔다.


“누구세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태식이가 아니라 낯선 남자였다.


“아니 당신은 누구세요? 분명히 어제까지 짐을 모두 빼기로 했는데 왜 여기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긴 내 집인데 누가 짐을 빼요?”

“무슨 소리예요? 김태식 씨가 매매계약서 쓰면서 어제까지 짐을 뺄 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당장 짐 싸서 나가요.”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경비원 두 명이 달려왔다.


“김태식 씨와 어떤 관계죠?”

“네 제가 그 사람 부인인데요?”


경비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어제는 907호가 부인이라더니 오늘은 807호가 부인이라고 우기네요. 자자 입씨름할 시간 없어요. 어서 짐 싸서 나와요. 그렇지 않으면 무단침입자로 고발하고 강제로 쫓아낼 테니까.”


나리의 꿈은 풍비박산이 났다. 불륜으로 쌓은 사랑탑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수정의 남편인 태식을 결혼 전부터 짝사랑했다가 수정과의 틈이 발생하자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상간녀가 되었다. 20년 이상 살 비비며 살았던 전남편과는 원수지간으로 이혼하고, 아이들도 엄마를 경멸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상황에서도 태식과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사랑. 죽을 때까지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랑. 그 사랑이 돈과 배신으로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나리는 여행용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오피스텔을 나왔다.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모텔로 갔다.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수정이가 한 말이 저주로 남아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것 같았다.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만들면 내 눈에는 피눈물이 나온다.’ 옛 속담이 틀린 말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하기만 했던 전남편이 떠올랐다. 아이들도 생각났다. ‘내가 바보짓 했구나. 그깟 사랑이 뭐라고.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을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내 눈에 콩깍지를 씌웠어. 나는 살 가치도 없어.’ 나리는 흰 종이와 볼펜 한 자루를 가방에서 꺼냈다.


(한 달 후)

‘다음 뉴스입니다. 베트남에서 한국인 사업가 K 모 씨가 호텔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베트남 경찰은 치정에 얽힌 살인이라고 보고 수사 중이라고 합니다. 범인은 같은 한국인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정은 두 딸과 함께 TV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런. 남녀관계가 틀어지면 살인까지 갈 수 있어. 무서운 세상이야. 너희들은 남자 잘 만나야 해. 알았지?”

“걱정하지 마, 엄마. 아빠 같은 사람만 안 만나면 되잖아?”

“그건 아니지. 엄마랑 아빠는 서로 안 맞아서 이혼했지만, 너희한텐 아빤데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아빠 없이 너희가 태어났겠어? 그냥 태어나게 해준 거만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어이구. 우리 엄마 또 천사표 날리시네. 딱 거기까지만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머진 아니야. 그럼 됐지?”

“그래. 네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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