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은 진실을 담고
(명훈의 집)
명훈은 30년의 복수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30년 전 백수정을 대학 첫 미팅에서 만난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수정이가 내 마음을 받아줬으면 혜선은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혜선의 죽음을 애써 수정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억지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수정을 다시 본 순간 혜선이 죽고 30년 동안 사랑의 불치 병자로 살아온 세월에 대해 수정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소심한 명훈의 복수라면 복수였다.
진한 커피 향이 실링 팬으로 올라가 다시 호수의 동그라미 파동처럼 거실 가득히 퍼졌다. 명훈은 커피가 식으면 버리고 다시 뜨겁게 내렸다. 눈가의 근육이 잔뜩 뭉쳐있다. 거실 창문 앞에서 서성이기를 몇 시간 째 하고 있다.
‘그래 수정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정점에서 모든 걸 털어놓고 그녀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주는 것으로 복수를 마무리하자.’
명훈은 결심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남은 건 어떻게 수정의 사랑을 정점에 올려놓는가였다. ‘이미 수정은 나에게 빠져있어. 태식과의 이혼 후 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이혼의 아픈 상처를 두 딸이 돌봐주고 있겠지! 이제 내가 본격적으로 나설 차례야.’
명훈은 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정 씨. 잘 지내시죠?”
“네. 딸들이 집에 와서 나름 잘 지내고 있어요.”
“서운한데요. 제가 두 따님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 같아요?”
“아이, 참, 명훈 씨도 저한텐 소중한 사람이에요.”
수정은 명훈이 서운하다는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보고 싶다’라는 말을 먼저 하고 싶었지만 배경음악으로 깔아두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번 주말에 제주도 가려고요. 가을을 담을 거예요. 가을 한가운데 수정 씨가 있으면 더 좋은 작품이 될 거 같은데요.”
“호호호. 지금 데이트 신청하시는 거죠?”
“수정 씨 그렇게 웃으실 때 보면 아직도 소녀 같아요. 너무 예쁘세요.”
“거절 못 하게 만드시네요. 같이 갈게요.”
“그럼 사진 콘셉트에 맞는 의상을 준비해야 하는데 같이 쇼핑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쇼핑요? 부담스러운데요. 그냥 자연스럽게 하면 되지 않나요?”
“하하하, 이런 핑계로 제가 옷을 사드리고 싶은 겁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저 충분히 그럴 능력 됩니다.”
“뭐 그러시다면 사양하지는 않을게요.”
“내일 점심같이 먹고 쇼핑해요. 약속장소는 제가 카톡으로 보내드릴게요.”
“네. 알겠어요. 내일 봐요.”
수정은 마지막에 ‘사랑해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붙으려고 했는데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명훈의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행복한 감정인가! 태식과 살 때는 늘 불행하다는 느낌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도 태식에게 당한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남자라는 족속은 절대 믿을게 못 된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두 딸이 저녁 식사 준비에 분주하다. 요리라고는 라면 끓이는 것 말고 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엄마를 위해 요리를 한다고 설쳐대서 지켜만 보고 있다.
“엄마. 오늘은 우리가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 볼 테니까 소파에서 TV나 보셔.”
“호호호. 엄마 호강하네. 이런 날도 오고. 먹을 수 있는 거 만드는 건 맞지?”
“그럼. 그동안 숨겨뒀던 요리실력 발휘할 테니까 놀라지나 마.”
싱크대 주변에 무언가 가득 쌓여 있는 게 보였다. 밀키트(MEAL KIT)였다. ‘그럼 그렇지. 너희들이 언제 요리를 해봤겠어.’ 수정은 모른척하며 ‘기대한다.’고 말했다. 두 딸이 사랑스럽다. 문득 명훈 씨가 생각났다. 아직은 딸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아니야 좋은 사람 만나고 있다고 말하는 게 나을 거야.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엄마를 어떻게 생각할지, 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감이 안 잡혔다. 그렇다고 이번 주 제주도 여행을 친구끼리 간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우스웠다. 그래 말하자. 숨기지 말고. 엄마 인생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으니까.
“엄마. 다 됐어. 이제 식탁으로 오세요.”
“오호, 기대되는데!”
“짜잔.”
“언제 이런 걸 다했어? 맛있겠다. 우리 딸 대단한데?”
“언니가 한 건 갈비, 내가 한 건 잡채, 나머지 반찬은 반찬가게 사장님이 한 거야. 호호호.”
“요즘 밀키트 참 잘 나오는구나. 요리하기도 아주 간편하게. 호호호.”
“어, 엄마. 밀키트로 한 거 다 봤구나?”
“아니야. 밀키트도 요즘 맛있다길래 한번 먹어보고 싶었어. 잘했어. 잘했어.”
세 모녀의 수다가 즐겁다. 딱 한사람 빠지니까 이렇게 즐거운 집인데…….
수정은 행복했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무슨 말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쉽게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엄마. 우리한테 하고 싶은 말 있지? 아까부터 계속 망설이는 게 다 보여.”
“그래 엄마. 괜찮으니까 말해봐. 혹시 남자 친구 생긴 건 아니지?”
“얘는 남친 생기면 좋지. 엄마도 이제 중년의 사랑을 멋지게 해봐야지. 안 그래 엄마?”
“으응. 그래……. 사실은 엄마 남친 생긴 거 맞아. 아직 알아가는 중인데 괜찮은 사람 같아.”
“뭐야. 우리 엄마 아주 얌전한 고양이네. 부뚜막에 언제 올라갔데? 그래서 어떤 분이셔? 사진은 있어? 보여줘 봐.”
수정은 딸들의 응원에 자신감이 생겼다. 핸드폰을 열어서 카톡에 있는 사진을 보여줬다.
“으앙. 잘생겼다. 키도 크고. 뭐 하는 분이셔? 나이는?”
“아이고 하나씩 물어봐.”
“빨리 말해줘 엄마.”
“응. 사진작가시고, 나이는 엄마랑 동갑이야. 다른 건 모르겠고 비혼주의로 지금껏 혼자 사셨데.”
“멋진 분이시네. 엄마는 이분 어디가 그렇게 좋아?”
“일단 대화가 잘 통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배려심도 많은 것 같고.”
“돈도 많아야지. 예술가랍시고 돈도 못 벌면 지금 나이에 엄마가 힘들어지지 않을까?”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돈도 잘 버는 것 같아. 사진 전시회도 자주 열고 하는 것 보면.”
“일단 엄마, 썸 타는 건 좋은데 재혼하는 거는 더 지켜보고 생각하자. 우리도 같이 만나보고.”
“그래. 그럴 생각이야. 연애하고 결혼은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엄마. 만나면서 알아가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흥신소에 내가 알아볼게. 내가 잘 아는 선배가 흥신소를 하거든. 아마 2~3일이면 중요한 내용은 확인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엄마. 우리 엄마 눈에 콩깍지가 쓰여서 아무것도 안 보일 거야. 그러니까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서 고생했지.”
“또 그런다. 아빠 욕하지 말랬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야. 너희들이 아빠를 욕하고 경멸하면 그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서 그런 스타일의 남자를 쉽게 끌어들이게 된대. ‘나는 부모처럼 살지 않을 거야’를 계속 생각하고 말하고 다니면 결국 부모와 같은 인생을 살게 된다는 통계도 있어. 이건 엄마가 다 살아보고 하는 이야기니까 아빠 욕은 하지 말고 그냥 태어나게 해주셔서 고마운 분이라고만 생각해. 그러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되지 않는데.”
“알았어. 알았어. 엄마. 제발 일절만 하셔. 부정적인 생각 안 할게.”
“엄마. 그분 이름이랑 아는 정보 있으면 다 줘봐. 내가 조용히 알아볼게.”
수정은 명훈의 뒷조사를 한다는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딸들의 이야기도 일리는 있었다.
“그래. 그럼 절대 모르게 해야 한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만 알면 돼.”
“알았어. 엄마. 그게 제일 중요하지.”
수정은 명훈의 명함과 사진, 전시회 자료를 딸에게 주었다.
“내가 아는 건 이것뿐이야. 더 알게 되는 게 있으면 또 줄게.”
“응. 엄마. 이걸로도 충분해. 그 사람들 완전 전문가거든.”
(백화점 의류 판매장)
수정이 가을 원피스를 입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잘록한 허리 아래로 펴지는 줄무늬 원피스가 걸을 때마다, 옆으로 몸을 돌릴 때마다 하늘거렸다.
“잘 어울리는데요. 파란 줄무늬가 허리선을 잘 살려주네요. 볼륨감도 좋고 더 날씬하게 보여요.”
“그래요? 색상은 어때요? 잘 맞아요?”
“화이트 바탕이라 밝아 보여요. 완벽한 화이트 크리스털인데요.”
“호호호. 놀리지 말고요.”
“일단 이건 사시는 거로 하고요. 이것도 입어봐요.”
“한 벌이면 돼요.”
“제가 안 됩니다. 맘 같아선 여기 있는 옷 모두 입혀보고 싶어요. 물론 다 사줄 수도 있고요.”
수정은 명훈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를 이렇게까지 존중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인데 흥신소에 뒷조사를 시키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만두라고 연락하고 싶었다.
명훈은 수정에게 여섯 벌의 옷을 사주었다. 원피스 두 벌, 투피스 2벌, 캐주얼 위아래 한 벌씩.
“다음은 핸드백을 보러 가시죠. 아, 구두부터 볼까요?”
“너무 많이 쓰시는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도 너무 과분해요.”
“아직 안돼요. 전 지금까지 그 누구한테도 옷을 사준 적이 없어요. 오늘 수정 씨한테 한꺼번에 다 사주려고 모아 놓은 거예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그동안 못해본 쇼핑 마음껏 한다고 생각해요. 오늘 제 예산은 2천만 원입니다.”
“네. 뭐라고요? 2천만 원요?”
“하하하. 좋은 작품 나오면 모두 커버되니까 걱정 마세요. 모델료는 따로 드릴게요.”
“모델료까지요? 그건 됐어요. 전문 모델도 아닌데.”
“사랑은 사랑이고 일은 일이니까요.”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작품에 담을 수 있어서 감사해요.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겁니다. 수정 씨한테는 뭘 해줘도 아깝지가 않아요.”
아하, 이 남자의 매력은 어디까지인가? 수정은 자신을 위해 2천만 원을 쓰고 있는 명훈을 보며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
(수정의 집)
집으로 왔다. 수정은 오늘 쇼핑한 옷과 핸드백, 구두를 거실 바닥에 놓았다. 소파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는데 입가에는 미소가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내가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될까?’
‘지금까지 참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보상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이미 가슴속 깊숙이 들어와 있는 명훈을 느꼈다.
‘이건 사랑일까?’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으로도 이런 감정을 설명할 수 없을 거야.
띠 띠디 따르릉
“엄마, 엄마. 그 아저씨 완전 대박이야.”
둘째 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뭐가 그리 대박인데?”
“세상에 엄마랑 나이 같다고 했잖아?”
“응.”
“엄마랑 학교도 같아. 같은 학번이고. 이것 봐봐 여기, 연세대학교 체육학과 91학번 이명훈.”
순간 수정은 명훈의 대학생 시절 얼굴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얼굴이 완전히 달랐다.
“어. 그러네.”
“근데 엄마. 더 대박인 거는 이분 성형수술만 8번 했어. 대학 다닐 때 화재사고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어서 8번이나 수술했데. 완전히 얼굴이 바뀐 거지. 그래서 지금 사진하고 학생 때 사진하고 다른 거야.”
“정말이니. 그럼 이분이 그 명훈이라는 거야?”
“엄마가 아는 분이셨어?”
“어. 엄마 첫사랑.”
“엥? 첫사랑? 첫사랑이 아빠였다며?”
“아니야. 이 사람이야.”
“그런데 이분은 왜 엄마를 못 알아봤을까?”
“그러네.”
“놀라지 마.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어.”
“뭔데?”
“이분 어마어마한 부자야. 고양시에 땅이 1천 평 있었는데 글쎄 그 땅에 GTX역이 들어선다지 뭐야. 땅값이 30배가 올랐다는 거야. 벼락부자야. 아마 자산이 300억 정도 될걸.”
수정은 첫사랑 명훈이가 지금 명훈 씨인 게 믿어지지 않았다. 300억대 부자라는 것도…….
한 가지 계속 떠나지 않는 것은 첫 미팅 이후 나를 좋아한다고 따라다녔는데, 나도 마음에 들어서 늘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는데 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었다.
수정은 풋풋한 20대로 기억을 되돌렸다. 분명히 누군가 가운데 있었어. 그래서 우리가 못 만나게 했던 거 같아. 그 친구 이름이 뭐더라. 뭐더라. 수정은 떠오르지 않는 이름 때문에 답답했다. 그 친구가 태식을 소개해 줬었다.
그래 마음을 비우면 생각나겠지. 생각나겠지.
제주도 가는 비행기에서 명훈과 나란히 앉은 수정의 입꼬리가 살짝 올려졌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 명훈의 얼굴에 가까이 대고 눈을 바라봤다. 사랑스러운 사람, 나를 처음 가슴설레게 했던 사람,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하는 사람. 당신과 나는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어있는 천생연분인가 봐요.
“하하하. 수정 씨. 그렇게 좋으세요?”
‘수정은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어. 너 명훈이잖아. 내 첫사랑 명훈이.’
“그래요. 실컷 봐요. 얼굴이 닳도록 봐도 돼요.”
명훈은 마지막 복수의 정점에 수정이가 올라가 있는 것을 느꼈다. 최고로 행복한 시점에서 나의 정체를 밝히리라. 그래서 혜선의 죽음도 상기시켜 주리라. 겉과 속이 워낙 같은 사람이라 계속 이렇게 생각하면 얼굴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명훈 씨.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무슨 이야긴데요? 수정 씨가 해주는 이야기는 다 재밌어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제 첫사랑 이야긴데요.”
“네? 첫사랑요? 하하하 벌써 궁금해지는데요.”
수정은 명훈의 몸을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손을 꼭 잡은 상태로 말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아마 4월 정도 되었을 거예요. 벚꽃이 백양로에 활짝 피어서 참 예뻤었거든요. 그때 첫 미팅을 했어요. 주점에서 했는데 제 맞은편에 앉은 남학생이 마음에 무척 든 거예요. 가슴이 막 뛰더라고요. 체육학과 1학년이었는데 명훈 씨랑 이름이 같았어요.”
명훈은 수정이가 꼭 쥐고 있는 손에서 갑자기 땀이 났다. 첫사랑 이야기한다면서 왜, 첫 미팅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명훈은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그 친구도 저를 좋아했어요. 원래 사람이 좋으면 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잖아요. 늘 제가 수업 마치면 강의실 밖에서 서성거렸어요. 그런데 제가 그 친구를 외면했어요.”
명훈은 침을 꿀꺽 넘기며 따지듯이 물었다.
“왜요? 좋아했다면서 왜 외면했어요?”
수정은 명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같이 하숙하던 친구 때문이었어요.”
“친구 때문이라고요? 친구가 어떻게 했는데요?”
“그 친구가 명훈 씨에 대해 안 좋게 말했어요. 순진한 얼굴 속에 늑대 본성이 강한 바람둥이라고요. 여자친구가 임신하자 헤어지자고 했고, 술만 취하면 추태를 부리며 싸움박질이나 하는 사고뭉치라고요.”
“그래서 그 말을 믿었어요?”
“아니죠. 제가 보기에 명훈 씨는 전혀 그런 남자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마음속에 담아두고 계속 좋아했죠. 첫사랑이라고 생각할 만큼요.”
명훈은 뭔가 묘하게 돌아가는 감정에 잃어버린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럼 둘은 다시 사랑에 빠지나요?”
“아니요. 결정적인 선택을 하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 친구가 명훈 씨의 참모습을 보여줄 테니까 그 모습을 보고 결정하라고 하더라고요.”
“참모습요?”
“군대 가기 전날이었는데, 군대 간다며 이 여자, 저 여자 닥치는 대로 잠을 자고 마지막 모습은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이 주점이었어요. 우리가 처음 미팅했던 그 주점 그 자리에 명훈 씨가 있었어요.”
“어떤 모습으로 있던가요?”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에다가 싸움했는지 팔에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제가 다가가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그 친구가 막아서더라고요. 지금 모습이 명훈 씨의 본모습이라며 이젠 그냥 가라고 했어요. 저렇게 놔두면 안 된다고 말하니까 이제부터 자기가 책임질 테니까 그만 돌아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너 저 사람 좋아하니? 라고요.”
“그랬더니 뭐라고 했어요?”
“사실은 초등학교부터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둘 사이에 제가 끼어들어서 방해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지난번에 소개해 준 태식 씨하고 잘해보라고. 명훈 씨는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제발 명훈 씨 앞에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 했어요.”
명훈은 머리가 띵했다. 지난 30년의 생각을 뒤집어버리는 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어쩌긴요. 그 친구가 너무 좋아하니까 일단 물러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런데 잊혀지지가 않더라고요. 나하고 참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리고 그 남자는 군대에 갔고 같은 하숙집에 살던 그 친구는 화재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명훈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혜선이 그럴 리가 없어. 모든 게 수정이가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서 생긴 일이야. 명훈은 간신히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그 친구 말이에요. 같은 하숙집에 살았던 그 친구요. 이름이 뭐였어요?”
“혜선이요. 정혜선. 맞을 거예요. 탤런트 정혜선과 이름이 같았어요. 얼굴도 예뻤고요.”
명훈의 눈가에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가슴 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한 것이 눈언저리를 흔들었다. 한 방울 떨구더니 이내 펌프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난 30년간 자신을 지탱해오던 혜선에 대한 사랑이 봇물 터지듯이 무너져 내렸다.
수정은 말없이 명훈을 안아주었다. 수정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명훈은 아이처럼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울었다. 비행기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스튜어디스가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가요?”
“아니요. 죄송합니다. 이 사람이 슬픈 이야기에 눈물샘이 터져버렸네요. 지금 진정하고 있으니까 괜찮아질 겁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명훈의 눈물에는 수정에 대한 복수가 진정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담고 있었다.
30년간 만들어진 거짓의 껍데기를 깨는 순간이었다.
수정은 밖에서 두드리고 명훈은 안에서 두드렸다.
첫사랑의 진실이 두 사람을 갈라놓은 껍질을 깨버린 순간 마침내 중년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다. 수정은 그토록 자신에게 물어왔던 ‘나는 행복한가?’에 대한 답을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