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정은 허탈함과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사업하느라 일에만 집중하며 살았다. 모처럼 느껴본 설렘과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었는데 상철이 원조교제를 하고, 자신을 성적 도구로만 취급했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몸을 탐했던 그의 손길과 입술, 꽉 찬 느낌을 오르가슴을 안겨주었던 그의 물건까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상철의 말대로 이건 오해일 수 있어. 그를 만나보고 결정해도 되는 데 너무 섣부른 것 같아.’
‘아니야, 사실이 아니라 해도 이런 일에 엮이는 남자라면 네가 생각했던 그런 남자가 아닐 수 있어.’
‘그래도 본인 입으로 하는 말을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들어봤자지. 이미 상황을 처리하는 모습에서 신뢰가 가지 않아. 마치 현행범처럼 경찰과 같이 갔잖아. 그런 상황이라면 나를 호텔에서 혼자 기다리게 하지 말았어야지.’
수정은 두 가지 마음이 쏟아내는 말들 중에 어느 말을 들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심한 불쾌감과 자신이 생각했던 사랑의 모습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호텔을 빠져나와 올림픽대로로 접어들었다. 잠실까지 차가 막혔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수정은 집으로 바로 가는 대신 한강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이 기분을 가지고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잠실대교 밑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한강이 바로 보였다. 주차장에는 한강을 바라보며 차박처럼 꾸며놓고 남녀가 데이트하는 모습이 보였다. SUV차량 트렁크 문을 올려놓고 문 위로 알록달록한 색깔의 전구를 연결해서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만들어놓고 뒷좌석 2열 3열을 눕혀서 방처럼 꾸며놓았다. 그 속에서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수정은 부러움 대신 그들의 앞날에 행복을 빌었다.
‘그래. 지금이 좋은 때다. 실컷 즐겨라. 연애할 때가 가장 행복한 때야.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지만 그 완성된 사랑을 온전히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사랑의 콩깍지가 씌워져 있을 때는 남녀가 사용하는 언어가 같지만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하면 서로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게 되지. 그냥 자기 기준에서만 생각하는 거야.’
수정은 차에서 내려 강변으로 걸어갔다. 왜, 집으로 바고 가지 못하고 여기를 들러서 이렇게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지 생각했다.
‘나는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기를 바라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좀 더 로맨틱한 기분을 느끼면서 살고 싶은 거야. 남편은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나에게 로맨틱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어주지는 않아. 원래 그런 사람이기도 하고.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익어가는 나이인데 사랑보다 의리로만 사는 건 너무 억울해. 남들 다 있다는 애인, 나는 지금껏 도덕적 기준만 생각하고 착한 남편, 사랑스러운 아들, 딸만 생각하며 살았어. 그 삶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야. 그래도 너무 나를 잃고 살아온 것 같아서 나를 찾고 싶은 거야. 나는 지금 나를 찾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거라고. 이런 내 맘을 애들 아빠는 알까? 나한테 관심이나 있을까? 내가 사업한다고 너무 많은 배려를 해주는 게 나는 무관심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지금 나한테 필요한 남자는 나를 위로해 주고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고 장미꽃 한 송이를 가지고 와서 불쑥 내밀어주는 그런 남자야. 내가 로맨틱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고 말하면 애들 아빠는 분명히 이렇게 말할 거야. ‘내가 로맨틱하지 않다는 이야기군. 우리 나이에는 그냥 아무 일 없이 건강하게 잘 사는 게 최고야.’ 늘 안정적인 것, 안전한 것만 찾는 사람이니까.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매력 빵점짜리 멘트라는 거야. 언젠가는 이 말을 꼭 해 줘야겠어.’
한참 생각에 잠겨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오늘 있었던 일이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전화를 받기 싫었다. 핸드폰은 계속 울리다가 끊어졌다. 수정이 다시 한강을 바라보는데 전화벨이 또 울렸다. 상철의 전화였다. 수정은 상철에게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 전화 또한 받지 않았다. 그 어떤 설명보다 확실한 증거를 자기가 겪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소녀가 쌍욕을 하며 나타나지 않았다면 더 창피한 일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예전의 상철로 보이지 않았다. 그냥 ‘나쁜 새끼’였다. 물론 어젯밤에는 너무 황홀한 밤이었지만 실체를 알고 난 후에는 몸의 반응을 머리로 차단할 수 있는 이성이 힘이 세졌다. 핸드폰 벨이 울리다가 멈췄다. 핸드폰을 백 속에 집어넣으려는 데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남편 정호였다. 수정은 전화를 받았다.
“나예요. 왜 전화했어요. 안 받으면 바쁜 줄 알지.”
수정은 받자마자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정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 지금 어디예요. 별일 없는 거지?”
정호의 물음에 수정은 억누르고 있던 짜증이 폭발해 버렸다.
“당신 말이 참 이상하네요. 마치 내게 무슨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런 말이 어딨 어요. 당신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되지.”
수정은 남편의 말이 자신의 귓속으로 타고 들어오는 뱀의 혀처럼 느껴졌다. 끔찍할 만큼 싫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무턱대고 질문을 날렸다.
“당신,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 거 같아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참 간단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질문이네. 그것도 느닷없이.”
“당신이 생각하기에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 거 같으냐고요?”
수정은 막다른 골목으로 남편을 몰아넣고 심문하듯이 물었다. 정호는 지금 이 순간 말을 잘해야 하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아니 평소부터 아내에게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답을 머뭇거렸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여자는 보호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 같아.”
“보호라?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여자라는 존재가 태곳적부터 보호받으면서 살아온 존재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경제적으로 보호받고, 다른 남자들로부터 보호받고….”
“그렇게 여자를 모르니 내 맘을 알 리가 없지. 됐어요. 나 지금 바쁘니까 퇴근하면서 전화할게요. 끊어요.”
“아니, 그게….”
정호가 말이 끝니기도 전에 수정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번에는 상철에게 다시 전하가 왔다. 수정은 전화를 받았다.
“왜 자꾸 전화해요? 안 받으면 이유가 있겠지요.”
상철은 갑자기 180도 달라진 수정의 말투에서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았다.
“수정 씨,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오해 같은 건 없어요. 내가 판단하고 결심한 대로 사는데 무슨 오해가 있겠어요? 더 할 말도 없고 듣고 싶은 말도 없으니까 전화하지 마세요.”
“적어도 무슨 이유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끝내시면 안 되죠.”
“상철 씨, 상철 씨는 여자가 무엇으로 사는 거 같아요?”
상철은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생각해 냈다.
“그야 음양의 조화를 따지면 여자는 남자 없이 못 살지 않을까요?”
수정은 상철의 뜻밖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서 실웃음이 나왔다. 상철도 말해놓고 너무 본능에 치우친 답이라는 생각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 너무 밝히는 대답이었나요? 지금 나는 수정 씨로 인해 사는 거 같아요. 수정 씨가 전화를 받지 않고 호텔에서 기다리지 않고 사라져 버리니 제가 아무것도 못하고 수정 씨만 찾고 있잖아요. 그러니 제발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 말해 줘요. 사람 애간장 다 녹이지 말고요.”
수정은 상철의 말에 쇄기를 박는 말을 해버렸다.
“호호호. 정확하게 오늘 저녁 8시까지는 상철 씨가 주는 달콤한 때문에 그런 남자 없이는 못 살 거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남자가 아니라 관심, 이해, 존중, 헌신, 공감, 확신 이런 욕구가 강렬하게 흡수되어야 살 수 있어요. 상철 씨는 나에게 관심은 많았지만 오직 섹스에 대한 관심으로만 가득 차 있었어요. 나를 존중해주지 않았고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공감도 해주지 않았어요. 이런 당신에게 내가 확신이 들겠어요. 지금 내 마음을 설명하고 있는 거 조차도 싫으니까 알았으면 이제 전화하지 마세요. 우린 끝이에요.”
수정은 전화를 끊었다.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상철에게 한 말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그래 난 요즘 관심이 필요했어. 늘 습관처럼 물어보는 관심이 아니라 정말 나를 생각해 주는 관심, 남편은 습관적인 관심도 부족했지 늘 날 배려한답시고 ‘당신을 믿어요.’‘잘 될 거야.’ 이런 말만 했지. 그런 모습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나를 존중해주지도 않았어. 오히려 자신이 존중받기를 원했지. 내가 남편보다 돈을 더 잘 번다고 이것저것 배려해 주면 오히려 자존심만 내세웠지. 가정에는 헌신적인 남편이지만 나한테는 헌신적이지도 않았어. 늘 아이들이 우선이었고 나는 아이들 엄마로만 생각했어. 나도 여자이고 싶은 때가 얼마나 많았는데. 공감 제로, 아니 제로는 아니더라도 부족한 건 맞아. 그러니 내가 인생을 잘 살고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던 거야. 모든 게 남편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 다섯 가지를 느끼지 못하고 사니까 방황하는 마음도 어쩔 수 없는 거야. 100년을 살아야 하는데 남은 50년을 이렇게 살아야 할까? 그럼 너무 억울하지. 내가 돈이 없어? 능력이 없어? 매력이 없어? 그래 나를 설레게 만드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야. 지구상에 남자가 반인데, 상철이 같은 변태 새끼는 잘 끝냈어. 어린년 하고 나를 동시에?….’ 수정은 세 명이 침대 위에서 뒹구는 생각을 하니 몸서리를 쳤다. 아무리 프리한 섹스를 나누는 시대라고 해도 그것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수정은 한강공원을 걸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로 넘쳐났다. 운동하는 사람, 삼삼오오 모여서 치맥을 먹는 사람, 한강라면 냄새가 뱃속 허기 세포를 자극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을 먹지 않았다. 호텔에서 근사한 룸 서비스를 받으며 황홀한 시간만 생각했었다. 배가 고프면 이성의 힘이 더 세지나 보다. 문득 군대 간 아들 생각이 났다. 아들과 통화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카톡을 남겼다. 「한강공원 산책하는 엄마, 퇴근길에 갑자기 아들이 보고 싶어서 아들 생각하며 걷고 있네. 군 생활 열심히 잘하고. 휴가 언제 나오는지 연락하고. 사랑해, 울 아들.」 셀카 사진도 한 장 보냈다. 마음이 조금은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이제 집에 가도 남편 얼굴, 딸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수정 자신도 그때그때 답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었다. 수정이 홈쇼핑 사업을 하면서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사업에 몰두하는 자신이 행복했다. 조금씩 성장하는 회사,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남편과 아들, 딸. 그게 사는 이유였고 행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돈에 대한 욕구보다 감정에 대한 욕구가 더 커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는 몰라도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회사는 시스템에 의해서 돌아가고 자신의 역할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바뀌면서부터 시간적 여유와 정서적 여유가 동시에 생겼다. 그런데 정서적 여유는 마음속에 빈 공간을 만들었다. 무언가로 채워야 하는데 도무지 그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자신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편과 딸이 거실에서 TV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 왔어요.”
“어. 여보. 지금 와요? 수고했어요. 나 아까 당신이 한 질문 말이야, 다시 생각해 봤는데….”
“됐어요. 뭐 그리 대단한 질문이라고 지금껏 생각하고 그래요. 나 피곤해서 씻고 먼저 잘게요.”
“아니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그런 말장난 같은 게 아니에요. 내가 사랑이 필요할 때는 사랑으로 다가와주고 내가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안아만 줘도 돼요. 내가 당신한테 그냥 안겨만 있어도 다시 힘이 날 수 있게.”
정호는 갑자기 아내의 화난 목소리에 멈칫했다. 그러자 수정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참 이기적인 남자예요. 내가 행복해하고 기분이 좋으면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지만, 내가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해하면 그걸 그대로 받아주지 못하고 꼭 따지려 들거나 나를 피하는 것으로 당신 기분을 상하지 않게 했죠. 그건 당신이 나를 존중하는 태도도 아니고 나를 이해하는 태도도 아니에요. 내 감정, 내 기분을 공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해결해 줘, 이런 말 따위로는 어림도 없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수정이 안방 문을 쾅하고 닫고 들어가 버렸다. 문 닫는 소리만큼 정호의 가슴에 와닿는 충격파도 강했다. 그렇다고 외도를 합리화할 수는 없었다. 정호는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김포에 두고 온 소녀가 걱정되어 지금의 황당한 상황을 조금씩 엷어지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봤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말을 해주던지. 좀 알게. 그렇다고 그게 바람피우는 걸 합리화시키지는 못해. 이런 식으로 하면 나도 어쩔 수 없지. 계속 복수하는 수밖에….’
수정과 정호의 감정선은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