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빙의
정호는 현경이 계속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알아보기는 하는데 계속 다른 사람처럼 대답하고 있었다. ‘현경 엄마의 영혼이 현경에게 들어온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현경 엄마가 어떻게 나를 알아봐, 아니야. 뭔가 충격으로 인해 기억이 뒤죽박죽 되어서 그럴 거야. 의사 선생님도 기억이 얽힐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호는 답답한 마음에 부천에서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갔다. 방송에도 몇 번 출연해서 신기할 정도로 잘 맞춘다고 소문난 무당이었다.
부천시 상동 00 오피스텔 7층 창문에 ‘처녀 보살’이라고 크게 붙여놓은 글자가 보였다. 도심 한복판 고층 건물에 있어서인지 대나무와 깃발은 보이지 않았다. 정호는 엘리베이터를 7층으로 눌렀다. 왠지 긴장되는 마음이 이상했다. 점 보러 처음 가는 것도 아닌데 이번만큼은 기분이 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가로질러 ‘처녀 보살’이라고 적힌 문 앞에 섰다.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어떻게 오셨어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녀 보살이라고 하더니 왜 남자 목소리가?’ 정호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또박또박 말했다. 긴장하면 늘 취하게 되는 그만의 습관이었다.
“네, 어제 전화로 예약한 김정호라고 합니다.”
“네. 잠시만요.”
그리고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예약자 명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정호가 서너 발짝 서성이기를 두 번 반복하자 문이 척하며 열렸다.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문을 열어주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정호는 그의 젊은 남자의 손짓에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오피스텔치고는 큰 평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도 있고 방도 따로 있었다. 거실은 사무공간과 대기 공간을 겸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정면에 방문이 하나 보였는데 그 방에 보살이 있으리라.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보살님께 들어가시면 먼저 합장으로 인사를 하시고요. 앉으라고 하면 방석 위에 앉으시면 됩니다. 예의를 잘 갖춰서 행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께서 거주하는 공간이니까요.”
정호는 허리를 굽혀 합장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예약자 이름을 말하자 들여보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녀 보살이라고 했는데 나이 어린 목소리는 아닌 것처럼 들렸다. 방문을 열어놓은 채로 남자는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정호는 방으로 들어가서 처녀 보살에게 합장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보살은 선비 책상을 앞에 두고 큰 방석에 앉아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고, 머리 스타일은 긴 생머리에 누가 봐도 단번에 빠져들 만큼 미인이었다. 정호를 보더니 말없이 손짓으로 앉으라고 했다. 정호는 사각형의 두툼한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왠지 모를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보살은 엷은 미소를 짓더니 정호를 보며 말했다.
“편하게 앉으세요.”
목소리도 예뻤다. 정호는 자신이 점을 보러 온 목적마저 잊어버린 듯 보살의 미모에 홀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네. 네.”
그러자 보살은 왼손으로 칠성 방울을 흔들고, 오른손으로 부채를 펴서 아래위로 흔들며 말했다.
“영혼이 뒤 바뀌었어. 엄마 혼령이 딸 몸에 들어가 있어. 네가 뿌린 씨도 못 알아보는 놈이 무슨 낯짝으로 돌아다녀? 벌 받을 거야. 억울하게 죽어서 저승도 못 가고….”
보살의 알 수 없는 말에 정호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보살이 화를 내며 말했다.
“쯧쯧쯧, 여자한테 붙어서 여자 능력으로 살았어. 네 팔자가 그래. 넌 네 마누라가 바람피워도 마누라 그늘에서 못 벗어나. 꼴에 사내라고 너도 바람피웠구나. 잘한다. 두 연놈이 쌍으로 바람을 피워대니 자식들이 집에 붙어 있으려고 안 하지. 자식들은 떨어져 지내는 게 살길이야. 같이 살면 험한 꼴 볼 거야.”
정호는 자신이 궁금한 걸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보살이 화를 내며 말하는 모습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뭔가 말을 하려고 하지만 입속에서만 맴돌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보살은 쌀을 한 줌 집어서 선비 책상 위로 흩어서 뿌렸다. 쌀 한 톨 한 톨을 이리저리 뒤적이면서 다시 말했다.
“성질난다고 마누라 하고 헤어지면 그때부터 넌 쪽박 차는 거야. 네 마누라가 바람피운 건 순전히 너 때문이야. 근데 참 웃긴다. 너는 집요한 데가 있네. 마누라 뒤를 캐고 다니는구나. 어쩌지도 못하면서. 잔머리 굴려봤자 네 마누라 사주는 못 당해. 그러니까 마누라한테 잘해. 네 마누라는 바람기가 있어도 가정을 깰 사주는 아니야.”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모든 걸 다 알까? 정호는 더더욱 말문이 막혔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 보살님. 그러면 지금 제가 돌보는 아이 몸속에 엄마의 영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네요? 그리고 제 아내가 바람피우는 것도 그냥 모른 척하라는 거고요?”
보살은 큰 눈을 다시 부라리며 정호에게 호통을 쳤다.
“넌, 아주 얍삽한 놈이야. 세상에서 네가 제일 착하다고 생각하지. 근데 넌 말이야, 네 사주는 말이야 너 혼자 힘으로는 지금 같은 호사를 누릴 수 없어. 네 마누라 사주가 워낙 좋아서 그 덕에 지금 그만큼이라도 누리고 사는 거야. 그런데 네 마누라 하고 헤어지면 네 사주대로 살게 돼. 그럼 쪽박 차는 거지. 아무도 널 거들떠보지 않아.”
“그럼 현경이, 제가 돌보는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굿을 하면 떼 낼 수 있어. 워낙 한이 많은 여자라 잘 나가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굿을 하면 우리 신령님께서 쫓아내 주실 거야. 그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거야.”
“굿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보살은 정호를 찬찬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또렷하게 말했다.
“천만 원!”
보살의 말에 정호는 깜짝 놀랐다.
“네? 천만 원요?”
“왜 놀라. 천만 원이 비싸?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천만 원이면 너무 부담스러워….”
보살은 정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복채나 올려놓고 썩 물러가!”
보살의 다그치는 목소리는 분명 본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신령님의 목소리를 입혀서 나온 소리였다. 정호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죄, 죄송합니다.”
정호는 마치 죄인처럼 굿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호는 혼란스러웠다.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병원이었다.
“여보세요.”
“네, 여기 병원인데요. 김현경 환자가 깨어났어요. 의사 선생님 진료도 하셨고요.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이삼일 내에 퇴원도 할 수 있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지금 가면 면회가 될까요?”
“네. 가능합니다. 오세요.”
정호는 급히 차를 돌려 병원으로 향했다. 자신을 알아보는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던 현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현경은 눈 깜빡임으로 의사소통을 한 후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었다. 그렇게 의식 없이 1주일이 지나고 다시 눈을 뜬 것이다.
현경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힘이 없어 보였지만 사고 이전의 모습처럼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호는 현경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현경아, 이제 정신이 들어?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니?”
현경은 정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의 키다리 아저씨. 호호.”
“그래. 현경이가 맞는구나. 지난주에는 네가 이상한 말을 해서 걱정 많이 했었어.”
“아저씨도 참, 그럼 사고가 그렇게 났는데 정신이 멀쩡한 게 이상하지.”
“그래. 맞다. 맞아. 사고 당시 기억도 돌아왔구나?”
“아니, 간호사 언니가 말해줬어. 입원할 때 내 상태가 아주 위험했었다고.”
정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경의 말투가 달라졌다. 한 번도 말을 놓은 적이 없었는데 마치 친딸처럼 말을 놓았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 어쨌든 다행이다. 간호사님, 그럼 퇴원 절차를 언제 하면 되나요?”
“오후에 병원비 정산하시고 내일 오전에 퇴원하시면 됩니다.”
정호는 현경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현경아, 퇴원해서 오피스텔에 있을 수 있겠어? 아니면 며칠 더 입원하던지.”
“아니야, 난 괜찮아. 이제 다 나았어.”
“어, 그래. 그럼 아저씨가 퇴원 절차 진행하고 올게.”
정호가 중환자실을 나가려고 하자 간호사가 말했다.
“점심 식사 후에 일반병실로 옮길 거예요. 보호자분 가지 마시고 오후 두 시까지 다시 오세요. 환자분 물품도 챙겨서 가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현경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정호를 바라봤다.
“아저씨, 딴 데로 가지 말고 이따 봐. 나 혼자 짐 옮기는 건 아직 힘들어. 알았지. 기다릴게.”
정호는 현경의 말투가 자꾸 신경 쓰였다. 꼭 다른 사람이 현경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보고 있지 않은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정호는 현경이 사고의 충격으로 조금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당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엄마의 영혼이 들어가 있어. 굿을 하면 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