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간, 나쁜 여자(16)
16. 여자의 나쁜 짓 - 백수정
텅 빈 집에 혼자 들어가는 기분은 죽기보다 더 싫었다. 그냥 호텔에서 잘까? 수정은 제주도 출장을 다녀 온 후 집이 낯설었다. 그렇다고 계속 호텔에서만 지낼 수는 없었다. 가장 편한 장소여야 하는데 지금 수정에게 집은 적막강산 그 자체였다. 택시는 수정을 내려주고 바로 떠났다. 수정은 불꺼진 집을 바라봤다. 숨이 막혔다. 그래도 집인데, 집 놔두고 어디를 가겠어. 얼마 만에 들어가는 집인가. 남편은 집에 없을 것이다.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고 했다. 그길로 집을 나가서 오피스텔에서 지낸다고 했다. 현관문을 열자 집은 어두웠다. 불을 켜고 들어가 식탁 위 서류 봉투부터 봤다. 남편의 말대로 이혼서류에 인감도장이 찍혀 있었다. 순간 수정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이혼을 요구했지만 이렇게 쉽게 받아 들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껏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살아온 그녀에게 자신의 뜻대로 되었지만 오히려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생겼다.
‘흥, 이렇게 순순히 이혼하시겠다? 안 돼, 누구 좋으라고. 넌 내가 아주 고통스럽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게. 각오해 김정호.’
수정은 식탁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원위치로 돌려놓고 하나씩 만들어가자. 먼저 약점을 찾아야 해.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갈 수 있도록.’
수정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감사합니다. 꽃등 사설탐정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서 뒷조사를 좀 하려고요.”
“그럼, 저희 사무실로 한번 와 주시죠. 주소는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뇨. 제가 남편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 드릴테니까 알아서 해주시고요. 얼마죠?”
“네. 방문이 어려우시면 전화로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의뢰인께서 요구하시는 내용을 확인하겠습니다. 남편 분이 바람피우는 장면이나 현장을 사진 또는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보내드리면 되겠습니까?”
“네.”
수정은 매우 불쾌한 투로 말했다. 이런 말 자체를 하는 것이 자존심 상했고 저급한 수준으로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내해야 했다.
“남편 분 신상자료에 대해서는 지금 보내드린 이메일 주소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작성 양식을 먼저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대로 작성하셔서 다시 보내주시면 됩니다.”
“네.”
“그리고 착수금은 300만원입니다. 원하시는 정보를 찾아서 최종 완료되면 300만원을 추가로 주시면 됩니다. 계좌는 이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하루에 한 번씩 진행 상황을 문자로 먼저 보고드리고 필요 시 전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전화번호는 남편분이 보실 수 있으니 친구 동생으로 등록해주시면 됩니다. 보고는 저희 여직원이 전담해서 할 겁니다. 친구 동생으로 설정하니까 ‘언니, 통화 가능해?’라고 먼저 물어보고 통화를 이어갈 겁니다. 그렇게 받아주시면 됩니다.”
“네. 그럴게요.”
수정은 전화를 끊고 바로 메일을 확인했다. 첨부된 파일에는 의뢰인 요구서가 있었다.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서 하나씩 작성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사진은 가장 최근 사진을 첨부했다. 직장 주소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오피스텔 주소, 잘 다니는 장소, 차량 등등…. 메일 답장 발송을 눌렀다. ‘메일이 성공적으로 전송되었습니다’가 떴다. 이어서 계좌로 300만원을 이체했다. 입금 후, 1분도 되지 않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나야, 지금 통화 가능해?”
“아, 탐정소죠?”
“네, 제가 먼저 전화를 걸때는 항상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통화가 가능하시면 '응. 그래'라고 해주시면 됩니다. 입금 확인했고요. 오늘부터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그래요. 부탁합니다.”
수정은 전화를 끊고나서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나쁜 짓을 먼저 시작했지만 쉽게 도장을 찍은 남편에 대한 복수심에, 아니 자신을 붙잡지 않은 태도가 더 괘씸해서 분노마저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돌봐줘서 호의호식하며 살아놓고, 내가 바람 피웠다고 쉽게 이혼을 생각해? 어디 두고 보자. 그렇게 되는지. 내가 바람 피운 것도 다 무능한 네 탓이야. 남자답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고, 한 번도 제대로 만족시켜 준 적도 없었어. 그래, 이렇게 된게 다 너 때문이야.’
수정은 자기합리화로 스스로 세뇌를 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이내 남편이 죽일놈처럼 미웠고, 증오스러웠다.
(3일 후)
수정의 전화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나야. 통화 돼?”
“응, 그래. 말씀하세요.”
“네. 의뢰인께서 요구 하신대로 남편 분을 3일 동안 미행했는데요, 19살 여자아이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아이까지 뒷조사를 했습니다. 부모는 죽었고요, 고아로 확인했습니다. 사진, 지금 전송하고 있는데요, 통화하시면서 확인해주세요.”
텔레그램으로 사진이 전송되었다. 수정은 사진 속 여자아이를 보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며 어디서 봤더라 생각했다. 떠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여자 아이는 지금 김포에 있는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고요, 남편 분 이름으로 전세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남편 분은 3일 중 한 번 오피스텔에 들렀다가 두시간 후에 다시 나와서 강서구 마곡동에 있는 오피스텔로 갔습니다.”
“네. 불륜의 현장을 잡아야 하니까 같이 있는 사진을 찍어주세요.”
“네. 그건 저희도 계속 잠복하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촬영이 제한되지만 다른 방법을 써서 같이 있는 시간대에 사진을 촬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 말인데요. 더 확인해 보세요. 아, 그리고 혹시 남편의 숨겨놓은 딸일수도 있으니까 유전자 검사도 한번 해주세요.”
수정은 무언가 촉이 왔다. 미성년자와 불륜이 아니라면 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김포시 구래동. 현경의 오피스텔. 저녁 8시.
정호의 차가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오피스텔 입구에 잠복하고 있던 탐정들의 행동도 빨라졌다. 그들은 머리에 안전모를 쓰고 화재 안전 점검원 복장으로 변장했다. 주차장에서 한 입주자가 비번을 누르고 들어가는 사이에 같이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입주자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탐정 중 선임자가 웃으며 말했다.
“화재 경보기가 계속 울리는 곳이 있어서요. 아무래도 고장인 것 같아서 점검 갑니다.”
“아, 네.”
“….”
탐정들은 현경의 오피스텔 문앞에 섰다. 장비를 챙겨들고 한번 더 확인했다. 뿔테 안경에는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었고, 화재점검 경보기를 교체할 새로운 경보기에는 원격 조정이 가능한 초소형 카메라가 부착되어 있었다. 장비 점검이 끝나자 두 사람은 벨을 눌렀다.
딩동 딩동
“누구세요?”
인터폰으로 정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1004호실 화재경보기가 계속 오작동해서 점검나왔습니다. 잠시면 됩니다.”
“어디서 나왔다고요?”
“네, 관리실에서 용역 받은 전기업체 직원입니다. 1004호실에 계속 화재발생 경보가 떠서요. 아무래도 교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5분이면 됩니다.”
“알았어요.”
잠시 후 오피스텔 문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화재 경보기가 계속 떠서요. 잠시면 됩니다.”
탐정 두 사람은 사다리를 놓고 주방 천장에 달려있는 화재경보기를 제거했다. 그리고 가져온 카메라 장착 경보기로 교체했다. 한명이 작업을 하는 동안 다른 한명은 카메라 장착 안경으로 오피스텔 안을 둘러보며 촬영했다. 2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 되었습니다. 화재 경보기 센스가 불량이라 새것으로 바꿨습니다. 이제 제대로 작동 될 겁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했습니다.”
탐정들은 서둘러 인사를 하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다. 정호는 관리실에 확인을 해보고 싶었지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춘 작업자들의 태도를 보며 그냥 넘어갔다. 탐정들은 차량으로 돌아와서 노트북을 켰다. 오피스텔 내부가 실시간 촬영되고 있었다. 불륜의 현장을 잡는데는 이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늘 불륜현장이 확인되면 이런 식으로 동영상을 확보했다. 이렇게 입수된 영상은 의뢰인 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유리한 담보물이 되곤 했다. 둘은 불륜 현장을 기대하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남자는 여자아이의 손도 한 번 잡지 않았다. 식탁에서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게 다였다. 대화 내용도 별 다른거는 없었다.
“현경아, 이번 수능은 꼭 봐야한다. 모의고사 성적도 좋고하니까 이대로만 하면 인서울은 할 수 있을 거야.”
“알았어. 그럴게.”
정호는 현경의 말투에 조금 어색했지만 사고 후 달라진 모습이어서 나름 적응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말투가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졌다. 마치 진짜 딸처럼.
탐정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불륜보다는 친자 확인쪽으로 방향을 선회해야겠다고 말했다.
“형님, 불륜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친자 확인쪽으로 가야될 것 같은데요.”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런데 말야, 저 여자아이의 야릇한 눈빛이 자꾸 걸리는데. 말은 딸처럼 하는데 눈빛은 연인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아주 재수 없는 눈빛이야. 욕망이 가득찬 눈빛. 잘 봐.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데. 일단 둘 다 해보자. 친자 확인도 해보고. 영상 촬영도 계속 하면서 말이야.”
“형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그런 눈빛이네요. 뭔가 큰 일을 저지를 듯한 눈빛이에요.”
그날 밤 정호는 10시 이전에 현경의 오피스텔을 나와서 서울로 갔다.
다음날, 아침. 탐정은 차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형님. 일어나 보세요. 오피스텔에 아무도 없어요.”
후배 탐정은 녹화기록을 뒤로 빠르게 감았다. 현경은 가방을 챙겨서 8시30분에 밖으로 나갔다.
“형님. 현경이가 아무래도 학원이나 도서관을 간 것 같은데요. 책을 챙겨서 가방에 넣고는 나갔어요.”
“그래? 그럼 잘 되었다. 만능키 준비했지?”
“네. 전기충격기하고 만능키 둘 다 있어요.”
후배 탐정은 자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아냐, 아냐. 우리가 도어록을 부숴버리면 안 돼. 지문 채취하고 소리 분석으로 하자.”
“장비 챙길게요.”
둘은 현경의 오피스텔 문 앞으로 갔다 먼저 붓으로 흰 가루를 묻혀서 가볍게 도어록을 터치했다. 자주 누르는 번호 4개가 식별 되었다. ‘1,2,3,0,*’. 화재경보기 카메라가 노트북으로 전송한 영상에서 현관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누를 때 들리는 소리를 분석했다. 그리고 순서를 알아냈다. ‘2013*’이었다. 탐정이 2013*을 누르자 현관문이 열렸다. 둘은 장갑을 착용하고 신발을 벗고 살금살금 들어갔다. 바닥에 있는 머리카락 긴 것과 짧은 것 여러 개를 수집해서 지퍼백에 넣었다. 화장실에 있는 칫솔도 가져갔다. 마침 준비해간 칫솔 중에 똑같은 칫솔이 있어서 대체용으로 놓아 두었다. 물을 묻혀서 놓는 걸 잊지 않았다.
(3일 후)
“언니, 나야. 통화 돼?”
“네. 말씀하세요. 어떻게 되었어요? 유전자 분석결과 나왔어요?”
“네. 사모님. 유전자 분석결과가 나왔는데요. 놀라지 마세요. 현경이와 남편분은 99.9% 유전자가 일치합니다. 친 딸이 맞습니다.”
수정은 어이가 없었다. 가정 밖에 모르고, 아내밖에 모르던 사람이 언제부터 바람을 피웠는지, 자신은 왜 눈치도 못챘는지. 20년을 속이면서 살았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사모님. 그런데 이상한 건요. 남편분은 현경이가 자신의 딸인지 모르는 것 같아요. 정말 후원자 역할만 할 뿐이에요. 대화 내용이나 하는 행동을 보면 전혀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거 같아요. 현경이도 그렇고요.”
“그럼 서로 부녀지간이라는 걸 모른다는 말이에요?”
“네. 확실합니다. 사연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부녀지간이라는 걸 모르는 건 확실합니다.”
“좀 더 확실해질 때까지 더 감시해줘요.”
“네. 그런데 이미 증거수집과 결론도 만들어서요. 1단계 작업은 여기서 종료해야 할 것 같아요. 잔금 300만원 입금해주시고요. 추가 작업은 고난도의 작업이라 착수금 없이 500만원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돈은 걱정말고 서로 정말 모르는지 그것만 확실하게 알아 봐줘요.”
전화를 끊고 수정은 자신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구체적인 나쁜 짓이 떠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