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위험한 여자의 선택
정호와 현경의 정사 장면은 실시간 화재경보기 속 카메라를 통해 노트북으로 전송되었다. 오피스텔 근처 주차장에서 모니터링 중이던 탐정들은 한편의 질펀한 포르노 비디오를 본 것처럼 흥분했다.
“선배, 이 정도면 양쪽 모두 한몫씩 챙길 수 있겠는데요?”
후배 탐정이 침을 꼴깍 삼키면서 말했다. 선배 탐정은 무언가 생각에 잠겨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이 없는 선배 탐정을 보며 다시 말했다.
“선배, 어떻게 할 거예요? 나는 느낌이 팍 오는데.”
선배 탐정은 턱을 괴었던 주먹을 떼 내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피스텔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자칫 잘못하면 사람이 죽어 나갈 수도 있어. 돈도 좋지만, 사람을 죽이는 문제는 다르지.”
“사람이 죽다니요? 누가 죽는다는 거예요?”
“생각해 봐, 김정호가 사랑을 나눈 여자가 친딸인 걸 알면 살고 싶을까?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에 충동적이기까지 한 사람이야. 선택은 하나지. 틀림없이 자살할 거야.”
후배 탐정은 상황을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평생 그런 태도로 일을 하면 돈을 벌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그건 그 사람 문제죠. 우리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막말로 딸인 줄도 모르고 관계를 한 놈이 잘못이지. 그것까지 우리가 배려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그래서 신중하게 처리하자는 거야. 돈도 벌고, 사람도 죽이지 않는 방법 말이야.”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요?”
“아냐. 당장 떠오르는 건 없어.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 일단 그 파일 앞부분만 편집해. 정사 직전 장면에서 끊어.”
“왜요? 정사 장면이 신랄하게 나오는데 왜 거기서 끊어요? 백수정 씨가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결정적 장면을 가지고 오라고 했잖아요?”
“넌 그래서 아직 고수가 못 되는 거야. 감질나게 만들어놓고 흥정을 해야지. 다음 장면이 뻔히 정사 장면으로 이어지는 걸 아는데, 궁금해서 미치게 만들어야 제값을 받는 거야.”
“와, 역시. 선배는 달라. 얼마를 부를 거예요?”
선배 탐정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백수정 씨 능력을 고려하면 1억.”
“엥? 1억이나요?”
“백수정은 지금 뭔가 나쁜 짓을 생각하고 있어. 그걸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물이 있는데 돈을 아끼지는 않을 거야. 두고 봐 내 말이 틀리나.”
탐정들은 사무소로 돌아와 궁금증을 자아낼 수 있는 부분에서 영상을 잘랐다. 영상 파일을
백수정에게 보냈다. 잠시 후 백수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배 탐정은 후배 탐정과 여직원을 바라보며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거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니까?”
두 사람은 선배 탐정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며 ‘파이팅!’이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선배 탐정은 핸드폰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사모님.”
“영상 파일 봤어요. 그런데 편집이 왜 그 모양이에요? 뒷부분이 잘렸잖아요?”
“네. 그게 말입니다. 저희도 영상을 편집하면서 결정적인 장면이 나오도록 잘 만들어야 하는데요, 이게 워낙 조심스러운 부분이라서요. 만약에 정사 장면이 인터넷에 유출이라도 되면 저희 입장이 곤란하거든요.”
“뭔, 개소리야! 지금 나하고 협상하자는 거야?”
“아니, 사모님. 저희 입장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러시면 곤란하죠. 동영상 유출로 고소당하면 저희는 생업을 접어야 한다고요. 그래서 이런 상황이 되면 저희도 보험이란 걸 듭니다.”
“보험? 그래, 원하는 게 뭔지 말해요. 돈이야? 얼마면 돼?”
선배 탐정은 백수정이 자신의 덫에 걸려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남은 건 최대한 돈을 뜯어내는 거였다.
“보험료가 좀 비쌉니다. 2억은 주셔야겠는데요.”
“미쳤어? 2억? 장난쳐? 이거 뭐 순 사기꾼이잖아?”
“사모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김정호 씨한테 지금까지의 상황과 영상원본을 넘기는 조건으로 거래를 하면 됩니다. 사실 저희가 아쉬운 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래 관계는 서로 존중해야지요. 화가 나신다고 계속 아랫사람 다루듯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사.모.님.”
수정은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당하고 있을 수정이 아니었다. 사업을 하면서 온갖 협박과 협상으로 단련된 그녀였다. 이럴 때는 더 큰소리로 당차게 나가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게 너희들이 일하는 방식이니? 2억이면 너희 셋, 아니 몇 명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너희 셋 조용히 저세상으로 보내는 비용으로도 쓸 수 있어. 어디서 협박질이야? 당장 나머지 영상 보내. 2시간 내로 보내지 않으면 각오해.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너희들 사람 잘못 봤어. 지금부터는 내가 일하는 방식을 보여줄게. 더 긴말하기도 싫으니까 알아서 해.”
수정은 전화를 끊었다. 탐정들은 그녀의 당찬 기세에 혀를 내두르며 서로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선배 탐정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하, 이 여자 보통여자가 아닌데. 완전히 미친년이야. 이런 여자하고 산 김정호 씨가 더 대단하네.”
“선배,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2시간 준다고 했잖아요?”
“너희들 생각은 어때?”
한쪽에서 떨고 있는 여직원이 선배 탐정을 보며 말했다.
“선배, 그냥 의뢰인이 하자는 대로 해줘요. 우리야 뭐 한 몫 잡으려다 놓친 물고기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잖아요. 근데 미친년한테 잘못 물리면 우리만 손해에요. 그 여자 진짜 사고 칠 여자라는 느낌이 들어요. 위험한 여자예요.”
“그래? 그러면 난 더 베팅하고 싶은데. 나도 이런 부류의 여자를 잘 알거든. 우리가 더 세게 나가면 저쪽이 더 안달 할 거야. 일단 여기 사무실 접고, 예비 사무실로 거처를 옮기자. 흔적도 없이 모두 치워. 책상이랑 소파는 그대로 남겨두고, 문 앞에 ‘점포정리, 매매’라고 써 붙여놓고. 지금부터 작전 B로 간다.”
후배 탐정은 뭔 말인지 알아들었다.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그들이 늘 준비해 놓은 ‘작전 B’.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권토중래(捲土重來)!(흙먼지를 말아 일으키며 다시 돌아온다는 뜻)
핸드폰 번호도 바꾼다. 의뢰인과의 연결창구는 이메일만 남겨둔다. 최종 협상이 완료되면 USB로 동영상 파일을 넘겨주고 거래 끝. 그렇게 되면 인터넷상으로 영상 거래 기록도 안 남고, 만약에 유출이 된다고 해도 유출 책임은 의뢰인에게 있을 뿐이었다.
1시간 58분이 지났다. 수정은 이메일을 열어놓고 영상 파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2분 남았는데 안 보낸다 이거지. 요것들 봐라. 할 수 없지 직접 움직여야겠어.’
수정은 정확하게 2시간이 지나자 탐정사무소로 전화를 걸었다. 선전포고를 하려던 참이었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당분간 고객의 사정으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헉, 이건 뭐야? 이것들이 정말. 거래를 여기서 접겠다? 동영상을 주지도 않은 채?’
노트북에서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그렇지. 감히 나한테….’
탐정사무소에서 보낸 메일이었다. 그런데 첨부 파일에 아무것도 없었다.
‘사모님. 거래를 여기서 중단하겠습니다. 저희도 협박을 받으면서까지 일을 완료하고 싶지는 않네요. 영상 파일은 김정호 씨에게 보냅니다. 의뢰인의 비밀을 철저히 지키는 게 저희 업계의 룰인데요, 사모님 같은 분은 협상도 안 되고 오히려 협박하시니 협상 창구를 닫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만약, 생각이 바뀌시면 이메일로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2분 드리겠습니다.’
수정은 치가 떨렸다. 지금껏 협상에서 굴복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모든 연락처를 차단하고 숨어버린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남편 미행부터 영상 채증까지. 또 영상을 확보하더라도 지금처럼 협상하자고 하는 일이 생기면 시간만 흘러갈 뿐이었다. 시계를 봤다. 30초 남았다. 수정은 답장 메일에 ‘협상’이라고 적어서 발송을 눌렀다. 노트북을 펴놓고 수정의 답장을 기다리던 탐정들은 메일 알림 소리를 듣고 서로 쳐다봤다.
“내가 뭐랬어. 온다니까.”
선배 탐정은 메일을 열었다. ‘협상’이라고 적혀있었다. 바로 백수정의 핸드폰으로 연락했다.
“여보세요.”
“사모님. 무한 탐정입니다. 협상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래, 얼마면 되겠어요?”
“말씀드렸듯이 2억입니다.”
“그럼, 1억 먼저 보내고, 영상 확인 후 다음 미션까지 포함해서 완수하면 1억 주는 거로 하죠.”
“추가 미션이 뭘까요?”
“그건,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보고 드릴게요.”
“사모님, 저희는 심부름센터가 아닙니다. 탐정소란 걸 명심해 주세요.”
“2억이면 동영상 값만으로는 너무 비싸지 않을까요? 이제 선택은 그쪽에 달렸어요. 내가 요구하는 추가 미션을 수행할 건지 안 할 건지는.”
“글쎄, 그 미션이 어떤 내용일까요? 그 내용에 따라 다르지요.”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이 정도면 좋은 조건일 텐데요. 지금 1억 송금했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일단 동영상 먼저 보내주시고요.”
“사모님. 일방적인 협상인데요? 일단 1억 들어온 거 확인은 되었고요. 동영상은 보내겠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다시 이야기하시죠.”
“그래요. 좋은 협상이 되었네요. 다시 한 배를 탄 겁니다. 잘 해보자고요.”
수정은 전화를 끊고 피식 웃었다. ‘그래, 어쨌든 1억에 영상은 받았고, 나머지 1억은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미션을 줄 수도 있어. 그럼 추가 비용은 없어지는 거고. 아니면 내가 정말 힘든 일을 시킬 수도 있지.’ 수정은 거래에 만족했다. 선배 탐정은 전화를 끊고 나서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분명히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1억이 통장에 찍히니까 의뢰인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래도 당장 1억이라는 돈이 들어왔으니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수정은 영상이 담긴 USB를 퀵서비스로 받았다. 노트북에 접속해서 플레이를 눌렀다. 어떤 장면이 나올지 떨렸다. 화면 속에 현경이 발가벗은 상태로 남편 정호의 뒤로 가서 안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정호의 옷이 벗겨지고 뜨거운 애무의 시간이 흐른 뒤 삽입상태로 침대로 이동하는 장면. 남편의 섹스 레퍼토리는 한결같았다. ‘등신, 늘 저런 식이지. 그리고 5분도 못 버티고 싸버리지.’ 그런데 섹스는 10분을 넘어 15분으로 가고 있었다. 수정은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자신이 딴 남자랑 바람피울 때는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남편의 그 짓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여자의 그곳에 들어갔던 물건이 다시 자기 속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그래, 김정호. 넌 이제 끝이야. 내가 널 죽이진 않겠어. 그렇다고 네가 죽는 것을 막지도 않을 거야. 넌 선택하게 될 거야. 네가 뜨겁게 욕망했던 그 육체가 네 딸이란 걸 알게 되면.’
수정은 영상 파일을 멈췄다. 핸드백 속에 넣어 두었던 봉투를 꺼냈다. 봉투 겉면에는 ‘한국병원 유전자 연구소’라고 쓰여 있었다. 남편과 현경의 친자확인 유전자 검사결과지가 들어있었다. 수정은 두 개의 증거물을 쥐고 복수의 미소를 지었다. ‘부숴버릴 거야. 각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