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정신과 애자일(agile) 정신
일본의 덴소 웨이브와 히타치 캐피털, 히타치 시스템은 공동 개발한 자동 날인(捺印) 로봇을 개발했다.
이 로봇의 등장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일본의 도장 문화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각 결재자가 종이로 출력된 문서에 도장을 찍어 결재를 완료한다. 심지어 날인하는 데 있어 직급이 낮은 임직원은 도장을 더 기울여 찍어야 하는 겸양 도장 문화도 존재한다. 일본의 이러한 문화는 의사 결정의 지체 요인으로 지적되었으며, 실제로 일본은 코로나 사태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일본인들도 이러한 도장 문화의 비효율성을 인지하였고, 이를 효율화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로 개발된 것이 바로 도장 찍는 로봇이다.
도장 찍는 로봇은 덴소와 히타치가 공동 개발한 로봇기술의 집약체이다. 특히 도장 찍기에 앞서 종이 서류를 부드럽게 넘기는 기술은 기계공학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대응되는 특허에도 이러한 동작이 매우 자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사람이 종이를 넘기는 것은 쉽지만, 로봇이 종이를 넘기는 것은 동작의 메커니즘이 매우 복잡하다. 특히 로봇이 너무 강한 세기로 넘기면 종이가 찢어지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게 넘기면 종이가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로봇의 동작을 섬세하게 제어하는 것은 매우 난이도가 높은 기술로 평가된다.
다만, 도장 찍는 로봇을 두고 “굳이?”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도장 찍는 것을 자동화하는 것보다, 결재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어떤 배경에서 이런 로봇을 개발하게 되었을까?
과거 일본은 기술력이 매우 높은 국가로 평가받았다. 디지털 음원이 보급되기 전 소니의 워크맨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시장을 장악했고, 전기차 및 자율 주행 차량이 개발되기 전 렉서스는 잘 고장이 나지 않는 높은 품질의 자동차로 인정받았다. 휴머노이드 로봇 아시모(asimo)는 최초의 2족 로봇으로, 필자는 어린 시절 아시모를 보고 움직임에 감탄한 기억이 생생하다.
이러한 기술 배경에는 일본의 장인정신이 있다. 일본인들은 한 가지 기술을 전공해 그 일에 정통하려고 하는 장인정신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워크맨, 렉서스 및 아시모가 탄생하게 되었다.
장인정신이 강한 사람은 높은 전문성이 있는 반면 탄력적인 대응이 어려울 수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일본은 기존 기술 외의 분야에서 눈에 띌만한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최근 기술 트렌드인 빅데이터, AI, 자율주행 및 블록체인 등의 기술 필드에서 일본의 기술력은 낮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위에 설명한 일본의 기술력 중에서 워크맨은 스마트폰의 스트리밍 서비스로 대체되었고, 고장이 나지 않는 렉서스는 자율주행 차량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로봇의 구현에 있어서도 인공지능 모델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자동차 같은 경우, 과거 일본의 차는 10년을 타도 고장이 나지 않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최근에는 소비자들이 짧은 주기로 차량을 교체함으로써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 실제로 엔화가 역사적으로 약세인 이 시점에 일본의 수출은 부진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IT업계에서 “애자일”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애자일”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간결하게 “유연하게 일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내가 잘하는 것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하고 우직하게 행동하는 “장인정신”도 매우 중요하지만 트렌드를 파악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애자일 정신”도 매우 중요하다. 전문성 없이 트렌드만 쫓아가면 안 되겠으나, 중심을 잡고 애자일 하게 트렌드를 바라보는 것은 필요하다.
트렌드에 부합하는 전문성을 갖는 경우 트렌드에 부합하지 않는 전문성을 갖는 것보다 적은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다. 따라서 각자 갖고 있는 전문성이 트렌드와 부합하는지 주기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의 장인정신은 과거의 일본의 성장에 원동력이 되었지만 몰라도 지금은 일본의 시야를 좁히고 있는 독소가 된 것 같다.
장인정신으로 도장 찍는 기계를 만드는 대신 결재라인을 단순화하는 방법을 고민했으면 어땠을까? 결재라인의 단순화가 어렵다면 결재라인의 디지털 화를 시도했으면 어땠을까? 상황에 따라 초고난이도의 기술보다 단순한 프로그래밍이 더욱 효율적일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의 기술동향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장인 정신 뿐만 아니라 애자일 정신을 통해 효율적인 성장 전략을 세웠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