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전부 날리고 얻은 것.
아버지는 IMF 때 잘나가던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채소팔이, 신문 배달 등 여러 일을 전전했었다. 엄마도 나름대로 학원 강사, 구몬 학습지 등의 일을 시작 하시며 생계를 책임지셨고, 나와 동생은 학교에서 매번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 학생이 되었다.
그렇다고 기가 죽지는 않았다. 나는 오히려 공부로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했고, 두 자매가 학급 1등, 전교 1등을 하며 열심히 살다 보니 어느새 초등교사가 되어있었다.
"와, 드디어 해방이다. "
가난을 벗어난 기쁨에 가족이 행복해 하던 것도 잠시. 바뀐 것은 장바구니 뿐. 집도, 차도, 삶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초임 교사의 월급은 남아공에서 건너 온 원어민 교사보다 적었고, 나는 여전히 '더 나은 삶'에 목이 말랐다.
가난에 대한 결핍 때문이었을까,
교대 동기 언니의 제안으로, 나는 동생과 함께 화장품 건강식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정들었던 첫 학교를 6년 만에 내려놓고 퇴직금까지 손에 쥔 나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좋아, 이제 진짜 성공이다."
처음엔 자유가 달콤하기만 했다. 캠퍼스 상권을 돌며 영업하고, 팀을 꾸리며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학교 밖에 몰랐던 순진한 나는 차량 대출을 떠넘기고 잠적한 언니 대신 빚을 갚아야 했고, 팀원들을 모으기 위해 음식 값, 술 값을 마구 썼다. 그리고 사비로 화장품과 건강식품을 사서 샘플이랍시고 뿌렸다.
사업은 한 때 20명이 넘는 사람들을 데리고 미국 컨벤션까지 찾아가 본사를 견학하고, 비전을 품으며 커지는 듯 했다. 하지만 난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 불안은 의심을 낳았고, 의심은 팀원과의 불화로 돌아왔다. 동생과 매일 싸우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무너져 내렸다.
코로나가 닥치자 팀원들은 흩어졌고, 방에 틀어박힌 나는 "왜 나는 안 되지?" 라는 질문만 끊임없이 반복했다.
부모님께 퇴직 사실이 들통나고, 마이너스 인생이 탄로 났을 때.
나의 드높았던 자존감은 끝없이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돌아보면, 실패의 원인은 단순히 '운이 나빴다'가 아니었다.
내 안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첫번째는 의사소통 방식이었다. 나는 늘 예의바르고 배려 깊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 겸손은 학교와 집에서 항상 잘 통했다. 나의 감정을 숨기고 의견을 내세우지 않으며 상대에게 맞춰줬다.
'괜찮아. 내가 참으면 해결될거야.'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도 내 마음을 몰랐고, 나 조차 내 감정을 외면했다.
결국 스스로는 스스로가 지키는거였다.
두번째는 내 안에 무게중심이 바깥에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한 기준이 없으니 누구의 말이든 그럴듯하게 들렸다. '이게 기회야.'는 말에 설레고, '넌 잘못됐어.'라는 말에 무너졌다. 바람 부는대로 흔들리는 갈대처럼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흔들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돈도 인맥도 아닌 '나만의 중심'이었다.
세번째는 끝없는 자책이었다.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다 내탓이야.'라고 생각했다. 나를 채찍질하는 것은 자기계발서에 나온 대로 였지만, 이건 책임감이 아니라 나를 갉아먹는 습관이었다.
네번째는 돈에 대한 태도가 쉬웠던 탓이다. '벌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쉽게 썼고, 쉽게 잃었다. 돈의 무게를 너무 가벼이 여겼다.
퇴직금은 사라졌고, 남은 건 카드 빚과 지인들의 의아한 눈빛이었다. (잘 되는거 아니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가장 중요한 건 나와 내 가족이라는 걸 깨달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방향이 잡혔다.
사업 실패는 내 인생의 오점이 아니라 내 안을 들여다보게 한 사건이었다.
이제는 '나답게'말하고, '나답게'선택하고,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8년의 시간과 사라진 퇴직금 보다 값지다.